캐드강좌2005. 7. 28. 00:19

캐드 2004~2005에서 자동저장(SAVETIME 변수)


[2004 캐드나 2005 캐드는 임시파일의 저장장소가 달라집니다.]

기능: 일정한 시간마다 도면을 자동으로 저장하게 합니다.

  • 설정 값은 분 단위이며, 0은 자동저장 기능을 취소한다.(초기값: 120 분)
  • 저장되는 파일명은 작업을 할 때마다 변한다. 현재의 파일명 뒤에 숫자가 붙어 만들어진다(예 Drawing1_1_1_2345.sv$)
  • 확장자가 sv$로 저장됨으로 확장자를 "dwg"로 바꾼 후 Open할 수 있습니다.
  • 저장된 파일은 컴퓨터가 다운 됬을 경우만 복구할 수 있습니다.(정상적으로 프로그램을 끝내면 임시 파일을 삭제함)

명령: Command: SAVETIME[Enter] 1~5 (분) 정도로 설정합니다.

저장 경로 알아내기

  • SAVETIME을 1정도로 걸고 캐드화면에 도면을 그리면 1분후 저장됩니다. 이 때 F2키를 눌러 Text Windows 화면을 살펴보세요.


  • 또 다른 방법으로 캐드에서 menu- Tools- Option에서 임시 파일의 경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여기에서 파일의 경로도 수정 가능합니다.


복구방법

① 캐드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② 불러오기(Open)를 선택합니다.

③ "위치"를 위에서 확인한 폴더로 합니다.

④ 파일 이름을 아래와 같이(*.sv$)하고 열기를 선택합니다.


⑤ 임시로 보관된 sv$의 파일을 선택하고 이름을 바꿉니다.

  • 파일을 선택하고 색이 변하면 오른쪽 버튼을 누른다. "이름바꾸기" 선택 (또는 F2)
  • 확장자를 dwg로 바꿉니다.


⑥ 변경된 파일을 열기합니다.

Posted by 나데로
캐드강좌2005. 7. 28. 00:16

1. 휠마우스의 휠버튼 두 번 누르기: Zoom의 Extends 와 같은 기능을 한다.


2. 겹쳐진 Object에서 특정 Object를 선택하고 싶을 때 :

    Ctrl 키를 누르고 Object를 클릭면 Object가번갈아 가며 선택되는데 원하는 Object가선택되었을 때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르거나 엔터를 친다.


3. TRim 명령에서 Enter를 한번 더 치면 교차된 아무 선이나 자를 수 있다.


4. Trim 명령어가 이상하게 작동될 때(마디마디 여러개로 잘라질 때...)

    Edge옵션 -> No Extend 로 설정


5. Fillet 명령어를 잘 사용하면 가공 할 만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모따기 외 기능...)

    Radius 옵션의 값을"0" 으로 설정하고 사용하면 Trim보다 편리하며 Extend보다 간편하다.


6. 선택된 객체 선택 해제하기

    Shift 키를 누르고 한번 더 선택하면 선택이 해제된다.


7. Express Tools 프로그램 설치 -> overkill 명령어 : 겹쳐진 객체 제거

    express_2.exe            1139764937_express_2.exe


8. 단축키 사용자 정의 : 

    Support 폴더 밑의 acad.pgp 파일 편집. 프로그램 재시작 없이 반영하려면 reinit 명령어를 쳐준다.


9. 이미지를 삽입하는 명령어는 "image"


10. cad 파일을 그래픽 파일로 만들려면 eps 파일로 출력하면된다.


11. 회색바탕위에검은색 라인 보이기

     회색바탕을 "draworder" 명령어 "Back" 을 선택하고 칼라를 회색으로 수정 -> 검은색 라인의 칼라를 검정색으로 수정

     ( ※ 칼라가 White 인 경우는 출력시 진한 검정색으로 출력된다.)





Posted by 나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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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바르셀로나 출신의건축가로
자유롭게 흐르는 선의형태를 3차원의표현력을 갖는 건축으로 전환시킨
아르누보 건축가중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다.

그는 자연에서 디자인모티브를 얻어 유추한 형상을 시각적 공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인체의골격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유추해내기도 하여 현대건축의 표현주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예시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은 시대와 양식그리고 작품이 이루어진 시대 그 모든것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놀랄만한 관찰력과 자연에 대한 대단한 관심은 하늘 구름 물 바위 나무 동물이나
산과같은 자연의여러가지 모습에서 독특한 건축물들에서 마치 떡주무르듯해놓은집이며
사람의뼈를흉내낸 기둥 옥수수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의 첨탑등을
들여다보고있노라면 이 건축가의 꿈이 얼마나 엉뚱하고 원대했는지를 새감 실감하게 된다
.
발레의나진스키 성악의마리아칼라스가 그러했듯이
안토니오 가우디는 건축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천재다.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아주 미세한 부분의 장식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가구나 스테인글래스로 만들어진
창호, 다양한 용도와 디자인의 금속장식 등 공간에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공간적, 시각적 요소를
디자인하였다.

오직 하나의 건축물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다른 작품들과는 유사한 면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하게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건축물을 살펴 보면 그의 정신 상태가 좀 뒤틀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건축물들은 들쭉날쭉한 파사드는 바로크식 건축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한편 불합리한 면도 다소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자연에 대한 영감에 의한 건축 구성은 다른 건축가와는 달라서
평면에서 나타나는 선으로서 추상적인 형태에 기초를 둔 기하학을 처음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100년전의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금속 세공업자였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어린 가우디는 병약한 소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17세에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향했고
이후 바르셀로나는 그의 평생의 고향이며 가우디 건축의 성지가 된다.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영국의 예술학자 존 러스킨의 "장식은 건축의 근원이다"라는 말에 중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의 과제는 그 유례 없는 대담함으로 종종 건축학교 교수들의 논쟁과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가 남긴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슬아슬한 점수를 받으며 건축 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계를 위해 바로 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에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자는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가우디는 여기에 가담해 지역의 토착 예술을 공부하고 중세의 고딕 양식에 심취해 있었다







"카사 바르토", "카사 밀라", "구엘 공원" 등 가우디의 작품은 누가 보더라도 개성이 뚜렷하다.
특히 장식의 극치를 이룬 후기작 "카사 밀라"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또 60여 동의 모든 건물을 지어 예술가의 마을로 조성할 계획이었던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이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신이 일찍이 자연을 창조했고, 이제 건축가가 그것을 계승하려 한다”는 가우디의 말처럼,
그는 자연의 재창조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공원은 예산 부족으로 서너 채의 건물만 지은 채 중단되고 말았다.








1883년 이후 가우디는 모든 작업을 중단한 채
바르셀로나 교외에 짓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건축에만 매달렸다.
지극히 정교하게 설계된 이 성당의 건축은 이후 40여년간 아주 느리게 진행됐다.

가우디 자신이 즐기는 건축학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그의 스튜디오 창문밖을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나무가 자기의 제일 좋은 건축 교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건축한 작품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을 보더라도
건물 한 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69년 이후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산책을 나섰다가 전차에 치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차림새는 검소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남루한 행색의 가우디를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바람에 그는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 3일 후, 가우디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가우디의 시신은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 끝 ---






가우디가 사망한 1926년 무렵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설계한 제2기 시립바우하우스 新校舍가 데사우(Dessau)에 들어섰다.


그 당시에는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지그프리드 기드온(Siegfried Giedion, 1888-1968) 등이 주창하는 합리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바우하우스는 가우디 작품과는 대치되는 개념으로 가우디의 작품을 
"구시대적 바로크 양식이며 비합리적이다"라는 등 많은 건축가들이

가우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1952년 가우디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계기로 많은 건축평론가와 이론가들이 가우디건축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 가우디에 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논문전시회, 연구, 강의가 개최되는 등 가우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정작 기존 건축가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자신의 스승의 건축 철학을 계승하는 것이 전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우디의 작품은 모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수많은 재현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가우디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어떠한 사람의 해결책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자연에서 영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자연적인 형태에도 다양한 해결책이 있기에 결코 반복될 위험이 없다.

가우디의 건축은 항상 자연속에서 직접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에 결코 식상하지 않으며 그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의 건축은 시간을 초월하였으며 그 이유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유용한 형태를 만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가우디의 유명한 말 중에 "독창성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든것의 근원은 신이 창조한 자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Posted by 나데로
프랭크 게리2005. 6. 26. 00:51


무려 16년 동안이나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며 진행되어 왔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10월 23일 목요일에 드디어 공식적으로 개관을 하게된다.

완공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LA 필하모닉의 본거지로서 사용되는데, 역시나 프랭크 개리의 작품답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이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

내셔널 네덜란드 빌딩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프랭크 개리의 작품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천재라는 점은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1990년 1월에 완료된최종 스케치.
프랭크 개리는 반드시 손으로만 스케치를 하는데, 스케치가 매우 개판(?)이기로도 유명하다.
이런 스케치 상태에서부터 완공된 모습이 머릿속에 있다고 하니
도저히 천재라고 하지 않을수가...



<사진출처 : http://www.laphil.com>


개관을 하루 앞두고 있는 콘서트홀의 전경.
꼭 한번 실제로 보고 싶다.
프랭크 개리의 다른 작품을 보고 싶은 사람은...



▼ 밑에 건물은 내셔널 네덜란드 빌딩 ...개인적으로 죠아하는 건물 ! ! ! 놀랍지않아요?





<참고>프랑크 게리는?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현재)는 이론에 치중하여 작품을 만드는 다른 건축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자신의 건축이념을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내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찻잔에서부터 의자에 이르는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이다"

- 피터 아이젠만 -



건축가이자 교수, 이론가, 건축역사학자이기도 한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현재)는 1929년 캐나다 온타리오州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남가주(USC)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건축으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졸업 후 "빅터그루엔"설계사무소(Victor Gruen Associates)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였으며,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하였다





1962년에 자신의 건축설계사무소(Frank O. Gehry and Associates, Inc.)를 개설할 때까지 로스엔젤레스와 파리 등의 설계사무소에서 건축적인 역량과 이론연구에 주력하였으며 1979년부터 1하버드대학, 예일, UCLA등의 유수대학에서 외래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건축은 본질적으로 3차원의 오브제(object)인 까닭에 조각이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건축 정의를 바탕으로 하루에 적어도 12시간 이상을 작품 창작에 쏟고 있다는 게리는 그의 건축에 관한 정의를 웅변하듯 기존의 건축 형태를 생성시키는 철골과 콘크리트 대신에 물결 모양으로 주름진 알루미늄과 다층적 철조망, 그리고 연속적인 굴곡면 등을 사용하여 건축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건축형태로부터의 과감한 이탈을 주도하고 있는 프랭크 게리는 건축비평가들로부터 1990년대를 새롭게 이끌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해체주의(Deconstructivism)로 이름 붙여지는 새로운 건축경향을 선도하고 있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현재 살아있는 미국의 건축가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건축물을 창조하고 있는 프랭크 게리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지만 건축비평가들 사이에 그의 작품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역량이나 작품이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같은 평가는 어쩌면 프랭크 게리가 TIME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그저 세계를 다루고 그에 대응할 뿐"이라는 창작관을 가장 잘 언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크 게리의 디자인 개념은 기존의 논리와 규칙, 그리고 질서를 초월하여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우연성과 영감 등을 선호하였다. 


또한 그의 창조적 디자인 개념은 건축 디자인에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자연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려는 시도와 함께, 규칙과 질서에 얽매어 있는 기존의 사고 형식을 깨뜨리는 자유로운 형태를 선호하였다. 

즉, 순간적 우연과 영감에 의해서 형성되는 자유로운 곡선을 자연에서, 주변환경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창출하였다.




주요수상
    1989년 프리츠커 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1992년 월프예술상(건축부문/Wolf Prize in Art)
    임페리얼 건축상(Imperiale Award in Architecture)
    1994년 릴리안 기쉬상(Lillian Gish Award)
    1996년 TIME이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 작품
    (블라디미르 밀루닉 공동설계-프라하 네덜란드보험회사 빌딩 1992-95)



주요작품
    1. 1981 Loyola Law School Los Angeles, CA, USA
    2. 1991 Chiat day office, Venice, California, USA
    3 1993 Frederick R. Weisman Art Museum, Minneapolis, USA
    4. 1994 American Center, Paris, France
    5. 1994 - Vitra International Headquarters; Basel, Switzerland
    6. 1996 Nationale-Nederlanden Building, Prague, Czech Republic
    7. 1999 Neuer Zollhof, Dusseldorf, Germany
    8. 2000 Conde Nast Cafeteria, NewYork, USA
    9. 2000 Experience Music Project, Seattle, USA
    10. Ghery Residence
    11. Residence




Posted by 나데로
건축역사2005. 6. 19. 23:15

○ 나라별 이름 

영국·미국- '아르누보 (ArtNouveau)'

독일- '유겐트 양식 (Jugendstil)'

프랑스- '기마르 양식 (Style Guimard)'

이탈리아- '리버티 양식 (Stile Liberty - 런던백화점 리버티의 이름에서 유래)'


○ 의미

1900년대를 전후하여 서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진 장식예술의 한 양식을 지칭.


○ 유래

1895년 파리에서 문을 연 사무엘 방의 메종 드 아르누보에서 유래.

파리에서 문을연 미술화랑 아르누보에서 시작이되었기에 아르누보로 이름지어짐.


○ 정신

신고전주의나 절충주의등 전통적인 취향에서 탈피하여(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도 연관)

시민을 위한 예술, 대중을 위한 예술 즉, 생활예술을 꿈꾸었으며 더 나아가 예술가의 자아를 존중하는 관념을 가짐.


○ 목적

"예술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이론을 기본으로 예술가의 주관성과 창작력에 의한 새로운 예술양식의 창조.


○ 특징

식물의 잎과 줄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늘고 긴 선적인 요소, 동물의 가죽무늬(반점 및 얼룩) 등에서 나타나는 면적인 요소를 디자인 모티브로 이용.

본격적인 근대산업사회의 태동과 함께 요구되는 새로운 형태와 미의 창조를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으로부터 찾으려 함.


곡선을 통해서 자연의 유동적 형태들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통해 가리워진 실재의 본질이나 자연의 창조활동의 무한한 과정을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직선보다는 소용돌이치고 서로 교차하는 곡선이 주로 사용됨.

곡선은 구불구불하고 물결치는 듯하며 음악적으로 율동하는 듯 흐르고 있으며 타오르는 듯 섬세하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힘을 지닌 상징저인 선으로 표현되어있음.


대칭에 의한 균형보다는 비대칭으로 균형을 추구.

외형적인 불균형은 생명과 운동을 암시하는 격동적인 요소를 야기시키는 불가분의 표현이 되고 있음.


○ 전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누보는 쇠퇴하기 시작. 아르누보의 작품들과 가구들은 한정되어있고 유일한 것이었음.

포스터와 잡지의 그래픽 디자인으로 아르누보가 대중화되자 많은 양이 제작되었고 필연적으로질이 떨어지게되는 현상을 가져왔고 장식의 그 본직적의미는 생각하지 않은채 표면적인 장식의 스타일만을 본뜬 모방자들이 조악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그 가치는 최하의 수준으로 떨어짐.


1차 세계대전으로 자연히 소멸되어갔으나 지금 그 운동의 소재, 방법, 의의를 지향하는 아르누보의

기본 태도를 받아들인 20세기의 디자이너에 의해 변모, 발전해감.


○ 결점

아르누보는 확실히 새로운 양상이기는 하지만 혁명운동치고는 너무 보수적이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뿌리없는 표면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음.

아르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의 한 발로 이상으로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음.


미술 공예 운동이 중세라는 이상에 근거하여 수공예를 통한 생활의 개혁을 지향한 것이라면, 아르누보는 자기를 그린 장식과 환상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려 한 운동이므로 아르누보는 과거에서 이상을 찾기 보다는 자기를 추가한 것이며, 실재하는 육체가 아니라 정령을 형상화했기때문에 아르누보의 예술에서는 현실 자체를 소재로 한 것이 드뭄.


동시에 아르누보는 장인적 생산 체계를 도입하여 근대의 기술을 병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업 사회의 예술이지만 결국은 작가와 주문자의 취미의 세계에 머물고 합리적인 근대 사회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지닌 예술운동.




프랑스 아르누보 가구는 형태의 과장된 표현, 그리고 상감세공과 같이 그림이 든 장식으로 풍부한 로코코 전통의 유산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능숙한 기술에 높은 가치가 있었고 모든 방들의 통합된 디자인이 아니라 개별적인 작품들과 아름다운 재료들이 강조되었다.


아르누보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인기를 유지하였다. 로코코와 네오 로코코의 진수지가 프랑스였고 또한 19세기에 두 번 네오 로코코가 출현하였으므로 아르누보에 로코코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랑스 아르누보의 주창자로서 엑토르 귀마르(Hector Guimard)는 1882-85년 국립 장식미술학교의 외젠느 트랭과 샤를르 장누이 밑에서 공부하고 1889년에 에콜 데 보자르의 귀스타브 골랑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영국의 도메스틱 리바이벌 건축과 빅터 오르타의 소용돌이형 아르누보 양식 디자인에 자극받았다. 


1894-97년에는 파리에 있는 카스텔 베랑제의 집합주택을 설계했는데 이것은 고딕 리바이벌과 앙리 2세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그의 카스텔 베랑제는 아르누보 양식이 표현된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에서는 대개 ‘귀마르 양식’이라고 부른다. 그의 디자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주철로 만든 파리 지하철의 압구(1903)로 이것은 아르누보의 소용돌이 무늬 장식을 사용한 전형으로 꼽힌다. 


이것은 아르누보의 소용돌이 무늬 장식을 사용한 전형으로 꼽힌다. 귀마르는 1920년 시리즈 생산용으로 규격화한 첫 가구작품을 제작했다. 1920년대에 아르데코의 대두와 함께 아르누보 양식을 사용한 많은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귀마르도 그 후 유행에서 밀려나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졌다.






영국의 아르누보는 가장 중요한 예술적 개성을 가진 건축가이며 설계자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1863-1928)와 함께 글래스고우가 중심이었다. 매킨토시는 글래스고우에 있는 존 허친슨이 건축사무소에서 수업을 쌓는 한편,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야간수업을 수강하며 데생과 회화를 공부했다. 


1891년에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와 파리, 브뤼셀, 앤트워프, 런던 등지를 여행한 뒤 1892년에 런던의 사우스 케싱턴에서 내셔널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7년 후에는 글래스고우에 새로 설릴된 허니맨&케피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1913년까지 근무했다. 매킨토시를 비롯하여 그의 부인인 마가렛 맥도날드 매킨토시, 마가렛의 동생인 프랑세 맥도날드 맥네어, 프랑세의 남편인 허버트 맥네어는 ‘The Four’라고 불리웠다. 


1894년에 최초로 공동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이들은 1896년에 런던의 아트&크래프트 협회에 1900년에는 빈의 제 8회 분리파전에 출품하여 절찬을 받았다.

흰색을 주조로 하는 매킨토시의 인테리어는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 같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1896-1909년에 걸쳐 매킨토시는 자신의 대표작인 글래스고우 미술학교를 비롯한 몇몇 공공건물과 개인주택을 그래스고우와 그 근교에 설계했다. 


그 중에는 1902-03에 지어진 힐하우스도 포함되는데 전용 실내장식품이며 가구까지 함께 갖추어졌다. 그의 인테리어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글래스고우 티 룸으로 이는 뷰케넌 거리(1896)와 아가일 거리(1897)에 있다. 이 두 개의 티룸은 조지 월턴과 공동으로 설계한 것이다. 매킨토시의 유명한 타원이 달린 등이 높은 의자는 아가일 거리의 티룸을 장식했으며 나중에 완성된 잉그램 거리와 윌로 거리의 티룸은 식탁용 나이프, 포크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가 도맡아 디자인했다.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그의 전체론적 접근방식에는 상징주의가 활용되고 현대성과 전통, 빛과 그림자, 남성다움과 여성스러움 등 반대요소들의 조화가 두드러졌다.

매킨토시는 대표적인 글래스고우 파의 디자이너로 초기에 즐겨 사용했던 유기적 양식과 후기의 기하학적 양식은 빈 분리파와 빈 공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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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건축(근대건축)



근대건축운동은 비역사적인 기능주의에 바탕을 둔 건축을 창조하기 위한 시도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공간 개념은 새로운 건축이념과 재료로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19세기 건축 양식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20세기 건축은 근대적인 인간에게 합당한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색인 : 근대미술).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은 디자인을 맡은 예술가와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가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H. 무테지우스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그후 P. 베렌스가 1907년 아에게(AEG)회사의 건축 고문에 취임해 근대 디자인을 주도하면서 더욱 발전했는데, 1914년에는 쾰른에서 최초로 공작연맹 전시회를 개최해 새로운 건축을 선보였고 이념논쟁도 벌였다. 192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센호프 집합주택단지 주택전시회를 개최하여 외국의 여러 선도적인 건축가들이 참가했다. 당시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은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근대건축을 수업했다.

아돌프 로스는 1908년 논문 〈장식과 죄악〉에서 그 시대 문화에 대한 조형적인 가치가 없는 장식은 죄악이라고 주창하며, 건축가들은 실제와 내용이 분리된 허구의 건축을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빈에 있는 슈타이너 주택(1910)은 그의 근대건축 이념이 표현된 대표작이다.

그로피우스는 1915년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1919년에는 이를 미술 아카데미와 통합해 바우하우스로 발전시켰다. 그는 수공예 방식보다는 예술과 공업과의 협력을 통해 조형예술을 종합화해야 한다는 건축과 건축 교육에 대한 확고한 사상을 확립하고 1923년에 건축선언문을 발표했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여 1925~26년 선구적인 새로운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신축한 바우하우스 교사를 통해 근대건축의 본보기를 보였다. 1928년에는 H. 마이어가, 1930년에는 미스가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이어받았다. 미스는 자연적이며 우아하고 단순한 질서를 표현한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당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건축학교였는데, 그후 강제 출국당한 많은 바우하우스 교사들은 전세계에 바우하우스 교육원리를 전파했다.

그로피우스는 1934년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에서 M. 브로이어와 함께 바우하우스 교육이념을 교과과정에 도입했다.

프랑스에서는 T. 가르니에가 재료·구조·구성 등을 새로운 경향으로 개척하고, 1901~04년에 ' 공업도시계획안'(Cite industrielle)을 제안하고 1917년 이를 발간했다. 그는 근대건축, 근대도시를 위해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1903년 A. 페레는 파리의 프랑클랭가(街) 공동주택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과시했다.

한편 미래파 운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가 산텔리아의 미래도시 설계가 1914년 밀라노에서 전시되었다. 그는 도시는 새로운 기술 시대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래도시에 대한 확고한 환경을 제시할 것을 역설했는데, 1914년 ' 미래파 건축선언'으로 발표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1920~25년경에 전개된 표현주의 건축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제2제국의 붕괴에 따른 혼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술의 내적인 느낌을 철·유리·콘크리트를 사용해 표현하는 조형적인 외부형태를 추구했다. 관련 건축가는 B. 타우트, E. 멘델존 등이다.

1917년 레이덴에서 조직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de Stijl)은 예술 및 디자인 운동으로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 서로 직교하는 직선과 단순하고 명확한 표면을 사용하며 더욱 추상적인 건축 형태 언어의 순수성을 추구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건축가는 J. J. 오우트, G. 리트벨트 등이다. 위트레흐트에 세운 리트벨트의 슈뢰더 저택은 데 스테일의 건축 내용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건축의 이론적인 기초가 된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1923)를 발간하고 국제주의 건축을 지지했다. 그는 주거·도시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했다.

볼셰비키 혁명 후의 소련은 1920년 V.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결성 이후 건축 모델은 자연보다는 기계적인 미학임을 주장한 구성주의 건축이 대두되었으나 1930년대에 스탈린 정부가 근대건축을 싫어하여 고전적이고 기념적인 건축 양식을 채택하자 쇠퇴했다.

1930년대 이후 근대건축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토목 분야에서는 R. 마야르의 아름다운 구조미를 보여주는 철근 콘크리트 교량들이 건립되었으며, 핀란드에서는 A. 알토가 지역에 맞는 근대건축을 전개했다. 미국의 시카고파 제2세대로는 F. L. 라이트가 가장 대표적인데, 그는 초원의 건축을 통하여 건물이 들어설 대지·지역·구조·재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축 배치와 평면, 특성 있는 공간주제 등이 돋보이는 유기적 건축을 설계했다. 그의 후기 작품인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낙수장(1936)은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총서 제1권으로 발간한 〈국제주의 건축 Internationale Architektur〉(1925), 1932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근대 건축 전시회, 그리고 H.히치콕과 P. 존슨이 같이 쓴 〈국제주의 양식:1922년 이후의 건축 International Style:Architecture Since 1922〉의 발간은 근대건축의 국제화를 가속시켰으며, 기능주의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입체파와 신조형주의 회화가 지닌 미학의 영향을 받은 기능주의 건축가들은 건축 역사를 배제하고 장식을 거부하며,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의 기능과 기계미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건축가는 발터 그로피우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리처드 노이트라, 필립 존슨 등이다(→ 국제주의 양식).

미스는 초기에는 실제 작품보다 사무소 건물 계획안(1919), 유리 마천루(1921), 일련의 벽돌조 전원주택안(1923) 등의 계획안으로 그의 건축방법을 탐구하여 제시했으며,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 독일관(1929)은 근대건축에서 기억될 가치를 지닌 중요한 건축이다. 1937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일리노이공과대학에서 건축교육을 하며 시카고를 중심으로 철과 유리로 된 격자형 입방체 형태의 건축을 추구했다.

1933년 이후 독일·이탈리아·소련을 탈출한 건축가들의 미국 유입으로 미국은 국제주의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합주택안을 제시한 도미노 주택 계획안(1914~15), 시트로앙 주택안 전시(1922), 새로운 건축의 5가지 요점의 제시(1926), 국제연맹 설계경기 응모안(1927), 사부아 주택(1931) 등으로 근대건축을 체계적·논리적으로 전개했다.

근대건축국제회의(CIAM)는 S. 기디온, 르 코르뷔지에 등을 중심으로 1928년 스위스의 라사라즈 제1차 회의에서 결성되어 아카데미즘에서 건축을 해방시키고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미학과 환경을 창조하기 위한 근대건축운동을 전개했다. 그후 1959년, 10차 회의를 끝으로 해체할 때까지 진보적인 건축가들 사이의 국제적인 교류를 활성화하며 근대건축과 도시계획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토론하고 주장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근대건축가인 그로피우스, 미스, 르 코르뷔지에, 라이트, 알토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배적인 건축가로 활동했다. 또한 근대건축국제회의 해체 이후 J. B. 바케마, A. 반 아이크, 스미스슨 부부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 팀 10'(TEAM 10)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근대건축에 회의를 품고 이를 보완, 발전시키는 새로운 건축을 시도했다. 1960년에 결성된, 아키그램을 중심으로 활동한 P. 쿡(1936~) 등의 건축가들은 잡지 〈아키그램 Archigram〉을 통하여 '가동적 개념'을 도입한 건축을 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축에서는 상업 및 산업 사회의 상징으로 사무소 건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뉴욕 시에 있는 '스키드모어-오윙스-메릴 사무소'의 레버 하우스(1952), 미스의 시그램 빌딩(1954~58) 등이 대표적이다. 1952년경부터 근대건축의 전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근대건축이 추구한 기능주의, 국제주의 양식에서 기념적인 형식주의로 바뀌면서 건축가들은 조소적인 형태와 공간 처리에 큰 관심을 가졌다.

라이트의 뉴욕 시 구겐하임 미술관(1956~59),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 아파트(1946~52)와 롱샹의 교회(1950~55), 라투레트 수도원 (1957~60), 우트손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1956~73), 사리넨의 T. W. A. 공항(1956~62)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루치우 코스타, O. 니마이어 등 남아메리카의 건축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즈음 활동한 근대건축의 다음세대 건축가로는 J. L. 세르트, E. 사리넨, L. 칸, I. M. 베이, P. 존슨, 단게 겐조, K. 로치, C. 펠리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규모가 큰 많은 건축물들은 거의 모두가 문화 센터, 교육기관, 연구기관의 발주로 지어졌다. 예를 들어 한스 샤룬의 베를린 필하모니 홀(1963), 루이스 칸의 리처드 의학연구소(1960), 예일대학교 브리티시 미술관(1969~74), 폴 루돌프의 예일대학교 건축학부 건물(1963), 렌초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퐁피두 센터(1971~77), J. 스털링의 슈투트가르트 미술관(1980~83) 등이 있다.

다른 한편 항공교통, 박람회, 운동경기장 건축 등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건축의 발전에 기여했다. 단게 겐조의 1964년 동경 올림픽 체육관, 사리넨의 댈러스 공항, F. 오토의 몬트리올 박람회 서독관, B. 풀러의 미국관, M. 사프디의 주거관 67(Haitat 67), 그리고 오사카 엑스포 1970 등이 대표적이다. 고도로 발달한 건축구조 개념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건축을 탐구한 건축가로는 이탈리아의 P. 네르비, 미국의 풀러, 스페인의 E. 토로하와 F. 칸델라, 독일의 오토 등이 있다.





현대건축(탈근대건축)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근대건축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 색인 : 포스트모더니즘). 이러한 경향은 특히 미국에서 관련 저술의 발간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J. 제이콥스는 〈위대한 미국 도시의 죽음과 삶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1961)에서 근대건축의 이상향에 의한 도시의 파괴를 지적했으며, R. 벤투어리는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에서 근대건축이 상실한 건축의 상징성과 의미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며, 이는 근대건축이 너무 단순하고 순수한 것만을 추구하며 디자인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성을 지닌 건축을 만들 것과 상업건축도 건축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것을 주장하며, 건축에 역사적인 양식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야마사키가 설계한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프루트 이고우 아파트의 폭파 철거(1972)는 근대건축의 종말을 알리고 탈근대건축이 대두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탈근대건축가로는 C. 무어, M. 그레이브스, R. 스턴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P. 존슨이 설계한 에이티앤드티(AT&T;) 빌딩(1978~84)과 그레이브스의 포틀랜드 공공사업 건물(1980~82)은 탈근대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거의 모든 탈근대건축가는 실제로 근대건축가들에게 건축 수업을 받으며 훈련을 받았거나 근대건축가로 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탈근대건축에는 근대의 건축 내용이 많이 계승되어 있다.

또다른 탈근대 계열로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이성주의 건축가들이 있다. 이들은 도시 구조와 환경을 새롭게 하기 위한 시도를 보여주었는데, 상업주의와 근대건축으로 파괴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도시를 역사 속의 도시와 건축의 유형에서 그 단서를 찾아 건축의 고유한 자율성 위에서 건축을 한다. A. 로시의 〈도시의 건축 L'architettura della citta〉(1966)은 이러한 건축이념을 나타낸 대표적인 저술이다.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A. 로시, O. M.웅거스, L. 크리어, 그리고 스위스 티치노 지방에서 활동을 하는 M. 캄피, M. 보타를 들 수 있다.

그외에도 근대건축 이후에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C. 스칼파, R. 마이어, P. 아이젠만, H. 홀라인, 마키 후미히코, 이소자키 아라타, N. 포스터, F. 게리, R. 크리어, R. 보필, H. 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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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그로피우스2005. 6. 19. 21:58
-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


"
쓰기 좋고 보기도 좋은 건물이나 가구는 19세기에 없었다.
젊은 건축가 그로피우스가 교장이었던 독일의 건축 ·공예 학교 바우하우스에서 비로소 쓰임새를 중요시하는 현대 디자인이 꿈틀거리며 태어났다. 
"


"왜 오늘날의 스타일을 옛날로부터 빌어오는가? 모든 물건의 겉모습은, 그것이 등잔이건 의자건 건물이건 간에 쓰임새에 알맞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건축가나 디자이너는 지금이라도 속임수와 꾸밈을 버려라. 재료의 특성을 정직하게 살리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orpius, 1883-1969)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미술 ·건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이 되었다. 
취임식 날 그가 한 이 말은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건물 생김새를 보면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세세한 곳까지도 오밀조밀하게 꾸며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쓸모보다 눈요기감이었다.

요즘도 음악당이나 교회 ·미술관같이 예술성 있는 건물은 예쁜 모양으로 짓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런곳에서 살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튼튼하고 값싸며 편리한 집, 꾸밈새가 적고 단출한 현대식 건축이 맨 처음 태어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아름다움과 쓸모가 제대로 어울린 것만이 참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그로피우스에게 보기만 좋은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정말로 쓰임새있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끔 하겠다고 굳게 마음억었다. 그의 생각은 열매를 맺었다.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을 말하며 바우하우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의 뜻과 꿈이 펼쳐진 곳이며, 바우하우스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로피우스의 고집과 끈기 덕분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본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한 것이다. 
낮은 신분으로 다루어지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려는 뜻에서였다.


그로피우스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며 디자인을 하는 것이 사실은 기술이며, 이것이 좋은 조건에서는 예술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로피우스는 모든 학생들을 작업장으로 보내 기술자에게 기술을 배우고 직접 만들도록 시켰다. 
창조적인 힘을 갖게 하는 공부도 같이 가르쳤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들 가운데는 칸딘스키, 폴 끌레, 알베르스 같이 현대 미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았다. 
바우하우스는 곧 20세기 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꿈을 가진 교수들과 학생이 마음으로 뭉쳐진 혁신적인 학교였다.
이를테면 의자를 만든다고 하자. 
옛날에는 보기좋은 것이 디자인의 으뜸조건이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디자이너가 의자 만드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한다. 
또 의자는 어떻게 생겨야 앉기 편한가를 연구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내려면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을 거쳐 바우하우스의 의자는 튼튼하고 편하며 날씬하고 산뜻한 모양으로 태어나게 된다. 쓰임과 모양이 잘 섞인 바우하우스식이 되는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28년까지 9년 동안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 사이 바우하우스는 새롭고 뛰어난 감각을 만들어내는 요람이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그로피우스는원래 그의 일인 건축 설계 쪽으로 돌아갔다. 
바우하우스에서 그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그는 '기계와 예술의 슬기로운 조화'를 실현했으며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낯익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는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따위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 · ·이 그것이다. 
모두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가 남긴 훌륭한 유산이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한마디로 기능주의(機能主義 ; 건축 ·공예의 모양과 재료는 모름지기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 라고 할 수 있다. 만일 1919년 바우하우스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손으로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름답지만 불편한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끝 ---





-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中 -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 - Wlater Groupus(1883∼1969)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즉,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로피우스의 파구스 구두 공장(알펠드 안 데르 라이네 1911)


파구스 공장은 그로피우스가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한 뒤에 의뢰 받은 최초의 큰 건물로구두 골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그와 이해심 많은 건축주의 만남은 당시 '가장 진보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다.




1. 형 태
    - 통합된 입체적 볼륨으로 계획
    - 벽은 하나의 판으로 계획
    - 내, 외부공간 사이의 얇은 커튼 월로 고안
    - 벽 기둥은 외벽면 뒤로 후퇴 = 외관의 커튼 같은 효과 실현

    - 바닥슬라브가 있는 곳의 유리는 검게 채색 = 유리커튼 월에 영향을 줌


2. 구 조
    - 사무실 부분은 조적조로 지어짐
    - 정면에는 기둥을 갖고 있음
    - 후면은 내력벽으로 되어 있음
    - 바닥에는 철골보가 사용됨

3. 의 의
    - 기능주의 건축의 최초 예 = 펩스너(1960)의 평
    - 형태의 새로운 개념 부여 = 모퉁이 부분에 기둥이 없는 것. 구조적 문제가 아닌, 비물질적으로 처리하기 위함



바이젠 호프 주택 


독일의 중부 지방도시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위치한 바이젠호프 언덕에는 새로운 건축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독일 공작 연맹'의 실험주택이 있다. 

'독일 공작 연맹'은 1927년경 건축가와 예술가, 그리고 실업가들이 모여 독일 공업디자인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예술과 공업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태동한 모임으로 이들은 독일 근대건축 전개에 중요한 활동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고통받던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본다면 이 같은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 공작연맹에서는 개인주택들과 공동주택단지의 건설을 밀어붙였고 건축가와 예술가, 실업가들의 노력에 의해 바이젠호프 주거단지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바이젠호프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이와 비슷한 계획을 추진했다. 

지금까지도 바이젠호프의 주거단지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젊은 건축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실현된 건축의 미래와 비전 덕분이다.


이 주거단지는 모두 33개의 거주 단위로 이루어져 단일 주택과 24세대가 입주하는 아파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단지 계획은 미스 반 데로(Mies Van der Rohe)가 중심이 되어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잔 네레, 네덜란드의 우트, 그리고 독일의 피터 베렌스와 발터 그로피우스를 포함하여 빅토르 부르주아, 부루노 타우트, 아돌프 라딩, 요제프 프랑크 등 당대 유명했던 건축가 17명으로 이루어졌다.



베를린출신의 바우하우스 초대교장으로 피터베렌스의 사무소에 근무한바 있고 독일공작연맹 회원이며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기계를 부정 하려하지 않고 기계에 의해서 성립되는 현대산업을 인정하고 산업과 예술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부재의 부품화와 현장에서의 조립과 같은 건축기법을 주장하고 주요작품으로는 조형위주의 건축교육을 하는 바우하우스 뎃사우 교사와 스승인 베렌스가 설계한 터빈공장건물 보다 더 대담하였으며 강철 지지대에 의해서 단절되는 커다란 유리벽면이 특징을 이루고 있는 파구스(Fagus)공장,하바드 대학원 건물을 들수 있다.





Walter Gropius, Harvard Graduate Center, Cambridge, 1950 Bauhaus-dessau, 1925-1926 바우하우스 교사의 내부 현관
-조명기구는 모홀리가 디자인-




파구스구두공장, (1911)



--- 끝 ---





20세기 건축에 있어서 발터 그로피우스만큼 큰 역사적 역할을 한 사람도 없고 평가가 엇갈리는 건축가도 드물다. 

그는 20세기 디자인의 가장 큰 흐름인 바우하우스의 창설자이며 하버드 건축대학원이 현대 건축의 큰 흐름을 주도케 한 현대건축의 리더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함께 일하기도 한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에 비해 건축가로서의 평가는 높지 않다.


그에게는 작가라는 말보다는 지도자라는 말이 어울린다. 

프러시아의 중상층 집안이었던 거의 가계는 위대한 프러시아 건축가인 싱켈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 역시 어려서부터 싱켈의 영향을 받았다. 



병으로 뮌헨의 기술학교를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그의 일가집을 설계한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로피우스는 다시 이모할머니의 도움으로 마드리드에 가서 공부하다가 유명한 예술감독인 칼오스트하우스의 소개로 또 다른 당시 최고의 건축가인 페터 베렌스에게 가게 된다. 

거기서 후에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를 만나게 된다.


페터 베렌스 사무실에서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으나 20개월 만에 그만두고 충실한 협력자인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와 함께 그 자신의 사무실을 차린다. 

이때부터 그의 지도자적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보다 일찍이 그는 대량생산 주택의 사회적 수요와 경제적 이익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글을 써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AEG의 에밀 라테나우 회장에게 보낸다. 



이 일로 해서 그 자신의 일을 얻게 되지만 그의 뜻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공업 생산의 시대를 대비한 공장의 개조와 확장에 대한 생각을 편지로 써서 많은 유력자에게 보낸다. 

파구스 구두공장의 경영자인 칼 벤샤이트도 그들 중의 하나였고 벤샤이트는 이미 설계가 시작된 파구스 구두공장의 부분적 재설계를 그로피우스에게 의뢰한다.


그로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 중 4년간 상사로 근무하면서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의 족일군 최전선에서 특별임무나 휴가 외에는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그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생긴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쉰들러 말러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녀와 그는 1915년에 결혼한다. 

그들은 1910년에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었다. 

전쟁 동안 거의 만나지 못하자 그녀의 끊임없는 열정과 변덕이 그들을 헤어지게 했다. 

1918년 그로피우스는 전후의 혁명 정신에 깊이 사로잡혔고 브루노 타우트와 예술동맹을 결성하고 건축선언을 발표한다. 


1919년 그로피우스는 드디어 건축과 예술의 종합을 이루고자 예술동맹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조직 바우하우스를 바이마르에 창설했다. 

1919년 바우하우스 선언에서 그로피우스는 “모든 시각 예술의 최종 목표는 완전 건축이다. 건축과 조각과 회화를 하나의 전체로서 통합하고 수백만 노동자의 손으로부터 새로운 신념의 상징과 같은 것을 끌어낼 새로운 미래를 욕망하고 인식하고 창조하자”고 선언한다. 

그것은 정말 새로운 예술가와 장인을 위한 학교였다.



그는 예술적, 장인적, 공업적 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 학자들을 모았다. 

클레, 칸딘스키, 모홀리 나기, 브로이어 등 후에 세계적 작가들이 된 젊은 작가들이 바우하우스에 모여들었다. 

젊은 작가들은 학생들과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일만이 아니라 공사일, 금속 작업, 목수일, 인테리어, 가구 등 모든 것을 함께 작업했다.


1922년 미국 건축가 레이몬드 M. 후드(Reymond M. Hood)의 고딕타워에 밀려 짓지는 못했으나 그가 제시한 시카고트리뷴 사옥안은 건축사에 중요한 제안으로 남았다.

1925년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바우하우스의 교사를 옮기면서 워크숍, 스튜디오, 오피스, 카페테리아, 오디토리엄, 스튜던트하우스 그리고 그로피우스의 개인 사무실까지 포함해 서로 브리지로 연결된 복합 건물이 그의 지도하에 탄생하였다. 

20세기 현대 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가 세상에 형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로피우스라면 누구나 바우하우스를 떠올린다. 

바우하우스가 현대 디자인과 현대 건축에 끼친 영향을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처음으로 미술이 건축을 중심으로 종합되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도래한 시민 중심 사회에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가야 할 큰 길을 연 바우하우스를 만들고 키운 중심인물이 그로피우스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바우하우스라는 건축 중심 학교에 끌어들여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건축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폭넓은 이해와 지지를 얻고 있었던 그로피우스만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우하우스에는 에콜 드 보자르의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교육을 선보인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설계에서부터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 교수 초빙 등 거의 모든 일을 해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느 누구도 그를 독단적이라 하지 않았다. 

그는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였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그로피우스와의 교감을 통해 전체와 하나가 되어가는 공동체적 일체감을 느꼈다. 


그로피우스가 지나가는 일만으로도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영감을 얻었다.

그로피우스는 항상 저소득층을 위해 빛과 녹지가 가득한 어반 스케일의 건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지멘스슈타트 베를린블록은 그런 그의 노력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가 1927년에 제안한 가변하는 토털 시어터(Total Teatre)는 아직도 건축가들이 꿈꾸는 이상적 극장이다. 



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1934년 영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로피우스는 베를린에 사무실을 차린다. 

영국에서 그는 맥스웰 프라이와 캠브리지 근교에 임핑턴빌리지대학(Impington Village College)을 설계한다. 

그리고 1937년 하버드대학으로 초빙되면서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인상적인 현대 주택의 모델을 발표하며 뉴욕 세계박람회에 펜실베니아관을 설계한다.


후반기 그로피우스의 주요 작품은 1946년 설립된 건축가 협동체 TAC(The Architect Collaborative)과 함께 이루어졌다. 

TAC는 맨해튼 파크 에비뉴 한가운데 우아하면서도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많은 뉴요커로부터 파크 에비뉴의 사카이라인을 차단하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1949년 TAC과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대학원 센터를 설계했다. 

그는 하버드에 과거 건축에 몰두하는 에콜 데 보자르의 전통을 버리게 하고 사회적 가치와 공학에 근거한 새로운 건축을 심고자 하였다. 

그가 하버드 건축대학원장에 취임하자 옛 교육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이러한 신사고는 미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하버드에서 그로피우스는 일주일에 두 번 꼭 학생들의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그는 말이 드물고 더군다나 그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모든 학생들은 그의 가르침대로 움직였다.


1952년 하버드 건축대학원을 허드넷에게 넘기고 그로피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건축 세계로 나간다. 

1953년에 로드아일랜드의 주거단지를, 1954년에는 일본을 방문하고, 1957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던 펜암 항공사 사옥을 설계한다.



1956년 그는 개선장군과도 같이 독일로 돌아간다. 

베를린에 그의 이름을 딴 오십만 가구를 위한 주거도시 그로피우스슈타트를 설계한다. 

동시에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를 베를린에 세운다. 이어 미국 보스턴에 JFK연방사무국 건물을, 클리블랜드에 타워이스트를, 헌팅턴에 헌팅턴갤러리를 세웠다. 


1967년에는 바우하우스 대(大)회고전이 대성공을 거둔다. 

1969년 7월 5일 그가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전세계의 건축계가 그를 20세기의 가장 큰 일을 이룬 지도적 건축가로 애도했다.

그로피우스는 20세 때부터 영면할 때까지 66년동안 쉬지않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임무에 헌신하였다. 

그는 혼자 이루기보다 모든 사람과 함께 이루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였다. 

그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어떠한 천재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이룬 20세기 건축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로피우스의 카리스마는 남을 추종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잠재력을 일깨우는 힘이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하던 때를 가장 좋았던 때로 회상한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란 단지 자기분야의 전문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고 역사의 바른 흐름에 참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믿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베를린의 주거 문제에 대해 쉬운 비판 대신 당장 실현 가능한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대안을 제안하였다. 

그가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 그로피우스슈타트가 만들어진 것은 비판을 통한 수동적 현실참여가 아닌 대안 제시를 통한 능동적 현실 참여를 해온 그를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피우스는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도 그를 싫어했다. 

독일 최고의 건축가가 독일을 떠난 것을 섭섭해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건축가에게 집을 지을 기회와 가르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스피노자와 같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렌즈가 건축가에게 있어서는 프로젝트이고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언으로 “나의 장례식이 축제가 되도록 하라”로 말했으며 유언대로 그의 장례식은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축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천재는 문제인이기 십상인데 그는 비범한 재능과 범상한 인격을 지닌 대인이었다. 

그는 대건축가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때 르 코르뷔지에에 경도되어 그로피우스를 덜 평가하였었다. 

30년 전 《공간》,《현대건축》의 편집 책임을 맡았을 때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미스를 주로 다루면서 그로피우스를 비중있게 다루지 않은 것은 거의 천재를 덜 평가하였기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그가 더 크게 느껴진다. 


건축이 종합과학적 자리를 내놓고 디자인에 몰두하면서 현대 건축은 한갓 유행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백년을 돌아보면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은 엄청난 진보를 보이고 있으나 건축은 제자리에 서 있다. 지금이야말로 바우하우스가 다시 시작되어야 할 때다.

20세기 건축은 천재를 좇다가 건축의 본류를 잃었다. 



건축가들은 유행을 좇고 건축 교육은 바우하우스 이전으로 퇴화했다. 

건축가는 사회적 역할을 잃고 전문직으로 전락했다. 

이제 도시설계는 토목 기술자들의 몫이고 도시의 미래는 행정가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로피우스같이 사회 전반과 우리 시대의 하드웨어에 대해 설득할 수 있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대건축가가 나와야 한다. 

산업혁명, 민주혁명의 시대에 바우하우스가 있었듯이 정보혁명, 기술혁명 시대의 신 바우하우스를 만들 수 있는 제2의 그로피우스가 나와야 할 때다.



Posted by 나데로
미스반데로에2005. 6. 19. 20:59



Mies van der Rohe

(1886 -1969) [생애][작품]


1886
독일 아헨. Aix-Chepelle 에서 5 29일 태어남
1897-1900 Aix-Chepelle
소재의 Cathedral School을 다녔다.
1900-1902 Aix-Chepelle
소재의 Ecole des Arts et Metiers에서 공부했다.
               석공이었던 아버지의 일터에서 일했다.
1902
현장주임으로 일했다.
1903-1904
석공세공인의 공방에서 치장벽토의 장식을 그렸다.
1905-1907
베를린에 있던 부르노 파울의 스튜디오에서 견습 가구디자이너로 일하였다.
1908-1911
베를린에서 피터베런스와 일했다.
1912-1937
베를린에 건축사무실을 열었다.
1921-1925 11
월 그룹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6
독일공작연맹 전시회 대표 건축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젠호프 주거 단지
1926-1932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
1929
바르셀로나의 국제전시회를 위한 독일 파빌리온의 건축가.
1930-1933
뎃사우와 베를린의 바우하우스 교장
1931
베를린의 구축전시회에서 '우리시대의 주거' 라는 제목의 공작연맹파트의 대표
1938-1958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공과대학긔 건축대학학장. 캠퍼스에 새 로운 건물을 디자인하게 된다.
1938
시카고에 건축사무실을 연다.
1948
시카고 고층건물 계획안에서 유리와 철의 커튼월을 처음 적용함.
1950
대구조 스팬 시스템을 적용한다.
1959
독일연방공로상 수상.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영예와 존경을 받게된다.
1963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을 수상하였 다.
1969
시카고에서 8 17일 사망.



미스는 1886 327 Char Iemagne의 옛날 도시였던 아헨에서 태어났다.

현대건축 4대 거장 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9년 미국태생으로 미스보다 한 세대나 앞섰던 반면에 1883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월터 그로피우스와 1887 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르 꼬르뷔제는 미스와 같은 세대의 인물들이다


4대 거 장 중 월터 그로피우스만이 정규 대학에서 건축교육을 받았을 뿐 다른 세 건 축가들은 모두 정규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건축수련을 쌓은 것이 주목할 만 하다.





미스는 15세까지 고향 아헨에서 성당 부속학교를 다녔으며 후에 아버지가 운 영하던 석재시공회장의 현장과 어떤 스터코(석재 종류의 마감재) 시공회사의 제도실에서 건축에 첫 발을 딛기 시작하였다.
19
세 되던 1905년에 큰 뜻을 품고 베를린으로 간 그는 처음 일하게 된 건축가 의 아틀리에에서 자신이 나무 구조와 가구에 대한 지식이 너무 빈약한 것을 깨닫고는 당시의 저명한 가구 디자이너이며 건축가이기도 하였던 부루노 파울 을 찾아가 그 밑에서 배우게 된다


미스는 1908년부터 3년간 베렌스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면서 칼 프리드리히 쉰 켈의 작품 세계에 심취하게 된다

베렌스 사무실 시절의 끝 무렵에 미스는 화란의 저명한 미술 수집가였던 크뢸 러 일가의 저택 설계를 위하여 오랜 시간을 화란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를계기 로 핸드릭 페트루스 베르나게의 건축에 큰 감명을 받았다

베르나게가 보여주 는 구조의 진실성과 논리는 미스 자신의 창작 태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
차 세계대전 이후 미스가 제작하여 세계에 발표한 5개의 프로젝트가 현대 건 축운동의 선구자로서의 미스의 위치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첫번째 프로 젝트는 1921년에 있었던 현상 설계안으로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종착 역의 맞은 편에 자리잡은 삼각형의 대지에 고층 오피스 빌딩을 설계하는 것이 었다.


미스가 제시한 안은 입체의 모든 면이 전면 유리로 감싸여진 결정체로 도로 면에서부터 20층을 단숨에 올라가는 듯한 안이었다

이 현상 안을 끝낸후 미 스는 유리 고층 건물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겼던 듯, 1922년에 Glass Skyscraper안을 발표하였다


미스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Free-form Amoeboid의 평면으로 구성된 이 프로 젝트는 우선 평면의 크기가 '프리드리히스트라세안' 보다 작은 반면에 30층 까 지 올려진 입면에 의하여 더 탑의 느낌을 주는 비례를 지니고 있고 미스의 말 을 빌리자면 도로 레벨에서 보이는 건물의 입체감과 유리에 반사되는 성격을 충분히 살리기 위하여 그 외관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조형적 창의력이 풍부한 이 두 고층 건물 안과는 아주 대조적인 '콘크리트 오 피스 건물안'을 미스는 1923년에 제작하여 전시하였다

현자의 패널만으로 이 루어진 콘테차콜 투시도로 이 계획안은 라멘구조 (철근 콘크리트 구조 방식) 의 성격을 간결하고 우아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미스의 5개 프로젝트 중 마 지막 둘은 '전원 주택안' 이었는데, 1924년의 벽돌 전원 주택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로서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그 잠재적인 가능성이 충분히 탐구된바 없다


서로 직각 방향으로 배열된 조적 벽면들 사이사이로 일련의 연결된 공간이 형성되고 몇 개의 조적 벽들은 지붕 을 구성하는 장방형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 속으로 뻗어나가는 이 디자인은 5 년 후 미스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공간감을 예고해 주 고 있다

일년 앞서 1923년에 발표된 콘크리트 전원 주택 평면의 Zoning 개념 을 보여주고 있다


1
차 대전 후에 일련의 프로젝트로 명성을 확립한 미스를 알고 있지만, 그에 게는 프로젝트를 통하여 어떤 건축의 문제를 분석하고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 는 습관이 있었고 제자들과 후배들에게도 프로젝트로 끝나는 설계안을 만들어 볼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1960
년 미국 건축가 협회 A.I.A의 금메달 수여식에서 미스가 한 짧은 답사에 서 그의 생각을 그의 건축 작품에서 보는 명료함과 간결성을 갖고 이해할 수 있다


"
나는 학생, 건축가 그리고 관심있는 일반인들에게서 여러 차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갈 길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 운 건축을 고안 해 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한 시 대의 끝이 아니고 시작에 처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새로운 정신에 의하여 지 배될 것이며 새로운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힘에 의해하여 움직여질 것이며,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재료를 구사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새 건축이 생길 것 입니다." 


" 그렇다면 건축은 문명의 가장 으미있는 노력에만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연관 관계만이 진실합니다. 이 연관 관계를 나는 진실 의 양면 관계라 부르고 싶습니다. 토미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Adequatio intellectus et rei '진실' 또는 현대의 철학자가 현대어로 표현하듯이 '진실이 란 사실의 의의'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연관 관계라야 우리 문명의 복합성을 포용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건축이 우리 문명의 형태가 천천히 변 하여 가고 있는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건축가로 출발할때부터 미스는 과거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했으 며 대신 사용 재료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해주는 기술적 수단을 추구했다


그는 구축의 엄격한 표현을 선호하여 모든 장식을 거부했다

그의 많은 계획 은 지어지지 않은채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그 각각의 시대에는 너무나 대담한 유토피아였다. 무엇보다 이것은 사상을 만든 건축이었다


재료에 내재하는 이런 특질은 이미 미스의 목탄 스케치와 모델에서 확연하다.
특히 유리는 고층건물의 둔감한 외피로서 간주된것만은 아니다

도리어 유리 는 빛이 굴곡된 벽에 부딪히는 방식에서 반사와 그림자를 만드는 풍요로운 요 소로서 이해된다. 전체의 접근은 어떤 근본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축체계에 새로운 강조를 두는 것으로 구성된다.


■ "
규율" 이 말은 미스의 삶과 일의 표어였다. 규율, 질서, 명징함, 진리
첫째 - 벽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응시하는 것
둘째 - 한가지 재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어 여러 가지 전통적 재료로 나아가 는 이성적 훈련이다.
셋째 - 현대의 특징적 재료 철, 콘크리트, 유리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넷째 - 현대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실용 목적은 물질적 진보의 척도일 뿐이다.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이야말 로 문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무엇이 기능이고 무엇이 가치있는 일 인가를 하나씩 명확히 해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미스의 건축에 보편성을 가지고온 건축적 문제 - 기둥과 피막
미스가 자주했던 "Less is More " 는 말수가 적었던 시절의 성격을 나타낼 뿐 아니라 철저히 아이디어를 정제해 내는 그의 제작 태도를 이야기 해 준다.
솔직함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라는 문제는 철과 콘크리트는 강함을 나타내는 건물의 뼈이다

유리는 빛나는 베일처럼 그 뼈를 감싸는 외피이다


미스의 마천루 계획안에서 뼈와 외피가 완전히 분리되어 뼈는 안에, 유리 외 피는 밖에 두고 바닥과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는 일과 날씨로부터 실내를 지키 는 일 사이에 시각적으로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미스에게 영향을 준 개념
1922
년이래 정기적으로 데 스틸의 데오 반 데부르그가 베를린을 찾아오고 있 었기 때문에 미스의 주택 작품에서 보이는 선형 비대칭의 평면 구성은 데 스 틸과의 화가가 즐겨 사용하던 직선 장방형, 사각형 처리법의 어느 부분의 영 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벽돌 주택 : 네모난 유리오 벽돌 덩어리 조합은 반통겔루의 작품을 연상시킨 다

평면계획은 몬드리안의 초기 회화를 연상시킨다

1910 (라이트 베를린 전시)에 미스가 라이트로부터 얼마나 강하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평 면은 전형적인 라이트의 전원주택 그대로이다.


미스에게 건축이란 재료로부터 공학을 거쳐 중요한 형식과 예술서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교육에 의하면 우리들은... 우연성과 임의성에서 탈출하여 합리적인 명쾌함과 이성적 순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 다."


--- 끝 ---





우리들은 모든 연상적인 미 또는 학설 그리고 모든 형식주의를 부정한다.
건축은 시대요구를 공간으로 실체화하고 거주하고 변화하고 새로이 전진하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니며 오직 오늘 이라는 날만이 형태를 조성할 수 있다. 오직 이런류의 건축만이 창조되어야 한다.


형태는 우리들의 직무에서 그 성격상으로 보아 건축의 문제만을 생각해야 한다. 형태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태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가 목적이라고 하는 것의 형식주의 라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우리 임무의 본질은 미적인 연상을 통제하고 어떤 것을 제외하고 무엇을 회복시키는 가에 따라서 건물을 자유롭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미스의 건축사적 사고는 그가 건축에서 형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나찌즘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미스는 그 시기 공간 속에서 어떻게 용()을 관련시킬까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방을 단위로 용()에 대응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말을 지었다

기능개념을 가지고 용()을 그 위에 결론짓는다면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행위이다

행위 그 자체는 사실 용()의 실태이므로 그것은 현실에서 가구와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하며 유동하고 거리낌 없는 광대한 원룸 안에 미스는 가끔 가구를 배치한다.



공간은 단지 가구만을 사이에 두고 행위에 직접 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것도 수용하는 공간을 미스는 '유니버설스페이스'라고 부른다

또한 정해진 사용실태를 결코 규정하지 않는 공간에 융통성을 주는 것이 코아 시스템이다.
판스워스 주택은 미스가 미국에서 실현시킨 두개의 주택 중 하나로 건축주는 독신 의사 에디스 판스워스 이다.


시카고 교외 폭스천 부근에 세워진 이 집은 그가 최초로 실현시킨 클리어스판의 건물이기도 하다

그 내부공간은 간결한 동시에 자유롭고 L, H형 서비스 코아, 즉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이 유일한 폐쇄적 요소였다.



테라스, 약간 높은 바닥면 그리고 평지붕, 이 세 부분의 수평면이 여덟 개의 H형강 기둥으로 용접 되어 잔디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공간은 설비 코아를 중심으로 상이한 기능을 갖는 공간이 천정까지 도달되지 않는 하프파티션에 의해 구분된다

또 바닥이 높이 들려 있는 것은 폭스천의 범람에 대처하기 위한 기능적인 해결이었을 것이다.


이 집에 사용된 재료는 아주 적은 것이었지만 기발한 사용법으로 훌륭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디테일의 엄격한 배려가 미스의 작품을 다른 에피고넨의 그것과 명확히 다르게 하고 있다

주위의 풍경 속에서 투명히 나타나는 마치 홀연히 출현한 테크놀로지의 부산물 같은 이 건축은 미스가 이상으로 하는 공간을 구현한 것이다



한편 미스의 주택에서 우리는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린 새로운 타입의 인간을 위해 건설한다는 관념적인 목표설정이 현실의 요청과는 대립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택은 그래서 당연히 고가이며 소수의 부유층에 한정되어 버린다


다음으로 내외의 공간적 연속성을 실현하기에는 충분한 녹지에 의해 주택 전체가 외계로부터 격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완벽한 조형은 전체의 조화를 파괴하지 않고는 부분적 변경을 허락치 않는다

때문에 그의 건물에 대한 이용자 측은 자기변혁에 의해서 건물과 완전히 동조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 이용자 자신에게 완전성과 자기억제, 절도와 고상, 우아함과 취미의 풍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현실과는 무관하였다.
참고적으로 미스는 늘 완벽에 가까운 시공수준을 요구했고 그 때문에 급상승한 공사비를 둘러싸고 미스와 건축주인 에디스 판스워스 의사 사이에서 재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합리주의 건축가중 미스 이외에 자유로운 생활방식에 대한 추상적, 유토피아적, 그리고 고결한 희망을 그와 같이 철저하게 건축에 구현 시킨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비적인 연금술은 '적으면 적을 수록 풍부하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을 반영하는 것이고, 즉 본질에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나타내는 해답은 예술의 과제를 동시대의 절망적인 혼란 속에서 질서를 잡는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자기의 건물을 자연 혹은 대도시의 혼돈 된 상태에서 이성의 오아시스로 자리하게 함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타내는 형태는 무관심이라든지 또 역으로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기 쉬운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며 그의 노력으로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의 비극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1922년 베를린의 한 건축 현상설계에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철골조와 유리만으로 된 프리드리히가() 오피스빌딩안()을 제출하기 전까지 인류 역사상 어느 건축가도 그런 건물을 그린 적이 없었다. 현대 도시의 특징인 글라스타워(유리 마천루)는 거기서 시작된 것이다. 거의 실험적 제안은 같은 해 발표된 ‘글라스 스카이스크레이퍼’에서 한층 구체화 되었다.


--- 끝 ---





조로하는 천재들과는 달리 미스는 세기의 역작인 글라스타워를 만든 이후에도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위대한 건축 작품을 만들었다

1886년에 태어나 1969년 영면할 때까지 평생 그는 건축에 몰입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수도였던 독일 아헨의 묘비 석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미스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미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일찍부터 중요한 건축가들에게 건축 교육을 받았다.

1907년 스물하나의 나이에 실력 있는 젊은 건축가를 찾던 건축주에게 발탁되어 첫 작품을 만들게 되었을 때 건축주가 그에게 이탈리아 여행의 기회를 주었으나 2년 넘게 지중해를 여행했던 르 코르뷔지에와 달리 미스는 고향의 침침하고 흐린 날씨가 그리워 햇볕 가득한 지중해를 떠나 중도에 돌아온다



1908년 미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지도자인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 들어가 그로피우스, 아돌프 마이어, 르 코르뷔지에 등과 함께 일한다

이때 싱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에게 구속될까 두려워 그때의 스케치 모두를 불살라 버렸으나 싱켈적인 신고전주의적 사상과 비례는 오랫동안 그의 작품에 남는다.


베렌스 사무실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헤이그의 크뢸러 하우스 설계였는데 크뢸러 부인의 설득으로 자기 자신의 안을 만들었으나 결국 그 일로 사무실을 떠나게 된다

베렌스의 사무실을 나온 후 1913년에 결혼하고 상류사회에 발을 딛게 되면서 미스는 젊은 예술가, 지성인 그룹에 참여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발칸 전선의 철도 엔지니어로 참전하였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 딸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으나 결혼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베를린 중심부의 옛 주거 지역에 집 겸 사무실을 차리고 직업 건축가로서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세계를 벗어나 역사주의를 배격하는 모더니즘의 물결에 참여한다.

미스는 처음에는 1920년대 표현주의 건축의 대표적 그룹인 11월 그룹의 방관자로 있다가 나중에는 주동자로 적극 참여한다

자유필름연맹, 사회주의연합 등 전위 운동은 물론 독인예술동맹에서 브루노 타우트, 한스 펠치히, 휴고 헤링, 그로피우스 등과 함께 일한다



이런 사회 활동 중에도 그의 건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계속되어 유명한 다섯 프로젝트를 목탄과 파스텔로 표현한, 미술전보다 더 미술적인 건축전시회를 연다.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글라스타워의 효시인 프리드리히 오피스빌딩이었다.


다섯 프로젝트 전시회의 처음은 베를린에서, 다음은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3주년 기념전에서, 마지막은 파리의 데스틸 건축전에 초대되었다



이후 그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건축가 그룹인 제네르링의 리더가 되고 독일공작연맹과 함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맡게 된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 족일의 지도적 건축가 이외에 르 코르뷔지에, J. J. P 오우드 등 세계적 건축가를 초대하면서 미스는 서서히 지도적 건축가로 자리하게 된다.


미스는 서른셋의 단독주택과 연립주택군 중 단 하나인 아파트먼트를 설계하고 마스터플랜을 주도한다

첫 번째 마스터플랜은 힐사이드를 조각적으로 처리한 것이었으나 최종안은 독일 빌라 단지의 전형적 배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가구와 모던 인테리어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예산과 공정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는데 미스는 내부 공간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처음으로 가동벽을 사용하고 그의 첫 의자인 튜블러 스틸 의자를 만든다



이를 계기로 유명한 바르셀로나 의자와 투겐드하트 의자를 연이어 만들게 된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미스 생애의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이때 처음으로 뛰어난 디자이너이기도 한 릴리 라이흐를 만난다


그녀는 그가 사무실에서 작품을 놓고 토론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바이센호프 주거 단지 이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0여년 넘게 그녀가 위대한 천재에게 미친 영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라이흐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으며 직물과 텍스타일 산업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927년 미스와 라이흐는 ‘벨벳과 실크 카페’를 함께 디자인하고 다음에는 실크 제작자인 크렐휄트의 집과 공장을 설계한다



이어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주택의 하나인 직물 제작자 투겐트하트의 집을 짓게 된다

투겐트하트 하우스에서 미스가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문손잡이에서 커튼레일에 이르는 집의 모든 부분을 디자인하게 된 것은 라이흐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투겐트하트 하우스는 그리테와 프리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탄생시킨 아른다운 공간이다


그리테는 브르노시()와 스필베르크성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두 아이를 가진 그리테가 미혼인 프리츠와 만나면서 브릭 하우스에서 살고 있던 미술 평론가 푹스로부터 미스를 소개받는다

미스는 처음에는 개인 주택이라 망설였으나 현장을 가보고 크게 만족하여 설계에 착수하였고 드디어 1930년 완성하였다



프라하에 간 건축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브르노에 가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현대 건축 최고의 주택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투겐트하트 하우스와 거의 동시에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인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 독일관을 설계한다. 원래는 국가관이기보다 산업관이었고 미스에게 맡겨진 일은 예술감독이었으나 부감독인 라이흐와 함께 일하면서 국가적 정체성 표현에 더 큰 역점을 두게 되었다


독일관은 전시공간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파빌리온 뒤의 270여 개의 독일 상품이 전시된 전시장으로 가는 입구 기능을 하는 공식 행사의 리셉션 장소로 기획되었으며, 오프닝 때 스페인 왕과 왕비가 오니스월 앞에 놓인 골든 북에 서명하고 리셉션라인을 마주한 곳에 왕관같이 놓인 바르셀로나 의자에 앉도록 공간 설계가 이루어졌다.



1931년 미스는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1933년부터 독일 경제는 하강하고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문화 열정이 나치에 굴복한 것을 미스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후 현상설계마다 낙선한다

그로피우스의 지명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지명된 후 새로운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새로운 교수진을 영입하고 라이흐를 인테리어 책임자로 지명하는 등 바우하우스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나치가 문을 닫게 한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미국에서 여러 제의가 들어왔다

그로피우스에 앞서 하버드대학에 석좌교수로 초대받았으나 같은 시기에 시카고의 아머대학[일리노이 공대(IIT)의 전신]으로부터 학장으로 초대되자 아머대학으로 간다

새로운 캠퍼스를 마련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교수 선발권 모두를 위임받고 독일을 떠나 시카고에 정착한 후 미스는 평생을 시카고에서 보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캠퍼스 건설이 중단되자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 특히 커리큘럼 개발에 몰두한다

커리큘럼의 기본 구조는 바우하우스의 기본 코스를 따른 것이나 “건축은 시대정신(Zeitgeit)의 표현이어야 한다.” 는 그의 건축 철학이 커리큘럼의 기반이 되었다

미스가 취임식 때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은 진실의 빛남”이라는 말은 건축의 질서, 명증성, 보편성에 대한 그의 신념을 대변한 것이다


미스는 교육에 몰두하면서도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후 30년 동안 미국에서의 그의 위대한 협력의 시대는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미스의 활동은 창조적이며 진실하던 역사적 참여의 시기인 독일에서의 생활과는 달랐다

이미 그의 이름은 세계의 것이었고 그에게는 릴리 라이흐 이외에도 그를 이해하며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미국에서의 여생은 위대하였으나 글라스타워,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섬광 같은 것은 다시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에서의 영광스러운 30년은 장엄한 낙조와 같은 시간이었다

시카고의 860호반 아파트. 뉴욕의 시그램 빌딩, 베를린의 신독일 미술관 등은 또 다른 걸작들이지만 시대정신의 치열한 각인은 아니었다.


필립 존슨이 쓴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책은 미스의 형이상학과 조형의지를 알게 하는 저작으로 책 뒤에는 미스가 평생을 쓴 글이 실려 있다

30년을 미국에 살았으면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세속과 떨어져 살았던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라는 절제의 미학을 감동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의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와 글라스타워에 감동하여 1968년 신문회관에서 연 두 번째 전시회에서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 메탈 하우스, 캐피탈 하우스라는 이름의 실험주택을 선보이고 다음 해에 글라스타워의 다음 단계를 의도한 스카이 빌리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스의 건축을 보고 당황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하여 “미스는 위대하였으나 현대 건축은 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미스(miss)되었다”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유럽의 건축을 알게 되고 현대 도시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미스 건축의 역사적 의미와 미학적 기반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미스의 프리드리히가 오피스빌딩 스케치를 보고 그의 엄청난 미술적 재능에 놀랐다.

미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끝없는 버림을 통해 드디어 ‘less is more'를 실현한 것이다

미스는 건축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날개를 가진 현대 문명의 시대정신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과 도시의 미술 형식으로 실현한 진정한 20세기 문명의 상징적 건축가다.


가우디, 매킨토시,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등 위대한 천재들이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보다 미스 한 사람의 영향이 더 크고 깊다

그들이 건축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크지만 현대 도시와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은 미스보다 크지 않다

라이트가 농촌 스타일의 자연 친화적 도시 건설을 주장하다가 만년에 마일하이타워를 발표하면서 혁명적인 초고층 도시 제안을 하고, 르 코르뷔지에가 이미 1930년에 ‘빛나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파리의 혁명적 도시구조 개혁을 제안하였으나 정작 지나고 보니 현대 도시는 미스가 1920년에 제안한 글라스타워를 기본 형식으로 삼은 셈이 되었다.



미스는 건축에 있어서는 혁명적이었으나 도시에 관해서는 자연과 역사가 이룬 현존하는 질서로 이해하고, 기존 도시를 새로운 건축 형식으로 진화하도록 건축과 도시의 대위법적 구조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 도시의 대세가 되었다


그의 건축은 건축 철학과 미학의 가능성과 보편성을 제안한 것이었다

초기의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 글라스타워 등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건축 형식으로 제안한 것이며, 이전의 모든 건축과 다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역시 역사시대의 건축과 다른 이차원집합의 건축 형식을 실험한 것이다



투겐트하트 하우스 역시 독특한 대지에 특별한 주인을 위해 설계된 개인주택이면서 어느 대지 어느 주인에게나 가능한 주거 형식을 선보인 것이다.

보편 공간이 되어야 하는 업무공간과 전시공간에 있어서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담는’ 새로운 현대적 공간을 창출하였고, 지금 그의 미학은 다시 의상을 바꾸어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것이 아메리카 대륙은 북미는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미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는데 정작 영국과 스페인의 건축가인 매킨토시와 가우디가 아메리카 대륙에 미친 영향은 미미한데 반해, 아메리카 대륙에 전혀 진출하지 못했던 독일의 미스가 아메리카 건축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매킨토시와 가우디가 개인적 천재에 몰두했던 데 비해 개인적 천재를 억제하고 역사의 의지와 소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미스의 작가정신에 더 많은 건축가들이 공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매너리즘에 가까운 포스트모더니즘이 탈(, post)되고, 해체주의가 해체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건축의 흐름이 미스의 세계를 다시 잇고 있는 듯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스는 아직 여전히 새롭다.




주 요 작 품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바르셀로나(German Pavilion) 1929




이 건축은 오늘날 지어졌어도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인 건축이었다상대적으로 긴장감 있는 부재의 크기와 요철없이 매끄러운 재료의 대범한 사용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판스워드 주택일리노이(Famsworth House) 1946~1950




이 주택은 그의 전작인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과 베를린 미술관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붕판과 바닥판을 잡아주는 U형강의 보에 의해서 결구되어 있는 단순한 구조물이다

모서리 부분은 유리로만 연결되어 있어 개방된 부분은 건물의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집주인은 이 집이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살 수 없다며 미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시카고(North Lake Shore Drive Apartment) 1949~1951




당시의 미국 건축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 고층 건축물의 외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쌍둥이 빌딩"이다

두 개의 보륨을 가진, 이런 유형의 빌딩의 효시 이기도 하다


26층 높이의 두 개의 육면체가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어 시각에 따라 생동감있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이 건축물에서 사용한 외부의 철골 디테일은 미스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소위 인터내널 스타일의 대표적 외관이 되었다.






시그램 빌딩뉴욕(Seagram Bldg) 1945~1958

현대의 사무용 고층 건축물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건축 철학과 예술관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물이다우리나라의 삼일빌딩도 이 건축물을 모범으로 한 것이다.






크라운 홀시카고(Crown Hall.I.I.T.) 1951~1955

기둥간격이 36M, 무주공간을 상자형태로 만들어 융통성을 극대화했다






국립미술관베를린(New National Gallery) 1962~1968

높이 만든 기단 위에 자리한 이 건축물은 미술관 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벽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여덟개의 십자형 강철기둥들로 지지되는 정사각형의 지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외주부에는 기둥이 없다. 그러나 이 건물도 역시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건물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Barcelona Chair’ 


바르셀로나 의자는 시각적으로 경쾌할 만큼 가벼워 보이고, 단순하며, 좋은 품질의 소재가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미즈 디자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X자형 프레임과 블록을 쌏아올린 것 같은 가죽 퀼팅은 세련미의 정수이다. 스틸 평단철에 크롬도금을 하였던 오리지날 디자인은 미국에서 생산되기 시작과 동시에 내구성이 강한 스테인레스 스틸 바로 교체되었으며, 크롬도금 대신 스테인레스 스틸의 자연스런 멋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762(W) x 762(D) x 762/430(H/S)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으로 집, 사무 공간, 상업 공간 등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작품." 1929년 바로셀로나 국제 전시회의 독일 전시장 인테리어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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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제2005. 6. 19. 20:54

르 꼬르뷔제의 건축원리



필로티(les polotis)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있 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지면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 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성의 결론이다. 


시트로앙 주택계획 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 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은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꼬르뷔제는 1929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서 이 같은 구상을 찬란하고 명석한 형태로 실현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53년 낭트 레제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도 이같은 구 상을 관철시켰다.



옥상테라스(Le Toit-Terrasse) :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 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이 제기할 수 있다는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같은 옥상 테라스의 초기개념은 이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각지의 유니테다비타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서와 같이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vre) :


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 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수 있게 처리 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 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 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가로로 긴 창(La Fenetre en Longeu) :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앙주택 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파사드(Le Facade Livre) :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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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제2005. 6. 19. 20:53

르꼬르 뷔제의 공간적 비평 



우리가 건축에 갓 입문하여 듣는 몇몇 이름들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르꼬르뷔제, 미스 반 데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 알토, 로버트 벤츄리은 어떤 절대적 상징과도 같다. 


학교의 오리엔테이션부터 시작하여 첫 수업 날에도 듣는 이름들이며, 공부가 계속될수록 그들의 작품사진을 수없이 보고, 도면을 베끼고, 사상을 읽어가며 그 천재성에 점점 매료되어 간다. 

학교 수업도 그들의 작품 중심이고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까지 안주거리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하나의 이즘으로 묶어보자. 

당연히 '근대주의'이다. 

'근대주의' 역시 우리의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이름이며 하나의 신앙이었다.

근대건축 이전엔 우리가 배울만한 것들이 없는 양, 우리는 근대건축을 배워왔다.



그런데 '근대건축은 실패했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겠는가? 과연 있을 법한 이야기인가? 아니, 우리는 이러한 선언을 경청할만한 여유라도 갖고 있는가?

글쎄!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이미 오래 전 세상을 울렸고 80년대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이론이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고 윤일주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근대건축의 실패' 가 있다.


제목부터가 쑈킹한 이 책을 시작으로 몇몇 근대주의 비판서적이 나왔고, 이는 근대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열을 올리던 우리 나라 건축계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되었다.

필자 또한 어느 날 서점에서 느닷없이 이러한 책의 제목들을 보게되었고 호기심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건축에 대해 아직 생소하던 필자에게 소화해내기 이른 책들이어서 반도 읽지 못한 채 팽개치기를 반복하던 중, 도서출판 국제에서 펴낸 간행 3권에 있는 조인철님의 '근대건축은 실패하였는가'를 읽게 되었다.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근대건축의 실패이론을 다루고 있어 필자의 의문을 풀기에 충분하였다.

이글은조인철님의 논문을 바탕으로 전개하겠다.

일련의 근대주의 비판서적들이 주장하는 근대건축의 최대 문제점은 주로 역사성의 한계와 근대주의의 주된 이즘인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근대건축 비판 서적들은 근대건축을 역사성 즉 전통과는 단절된 건축으로 간주함으로써 실마리를 풀어간다.

Hitchcock 와 Philip johnson 의 저서 'The International Style' 에서는 건축이 과거의 답습에서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가가 건축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건축이 전통과 단절된 듯 보이는 원인과 근대건축의 탄생배경을 살펴 과연 근대건축이 전통이나 역사와는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건축이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산업혁명이후 건축관련 산업은 자유로운 디자인을 가능케 하는 콘크리트와 같은 신소재로 인하여 새로운 방식의 디자인 원리를 요구했다. 



새로운 재료는 새로운 구조방식을 가능케 하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새로운 디자인 원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건축의 역사나 전통에 연연하지 않고 건축이외의 분야에서 그 원리를 모색하려는 노력을 했는데, Oud가 추상화에서 디자인 원리를 찾아낸 것이라든지 르꼬르뷔제가 큐비즘과 생물학적 구조방식을 건축에 적용시킨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몇몇 예들은 확실히 과거의 어떠한 관습과도 결별한 듯한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인 것이 모더니즘이나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등의사조는 과거 권위에서의 탈피를 그 사상적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Quatremere de Quincy의 주장을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모든 나라에서의 일정한 건축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은 거의 틀림없이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장르에서 조차도 전혀 새로운 것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모든 사물은 기본적인 원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집합적인 핵과 같은 것이다. 

기본적인 원리는 시간의 변화에 순응하며, 사물의 행태 전개와 다양화는 이에 따라 진행된다.



그래서 인류는 몇 개의 장르에서 수천 가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철학의 주된 목적은 그러한 것들의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건축에서는 소위 'TYPE' 이라고 하는 것이다.


Quincy의 주장은 다소 막무가내로 느껴지면서도 한편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몇몇 건축가를 제외하고는 소위 기능주의 건축가의

작품 중에도 전통과의 관련성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련성에 대한 논문으로 Collin Rowe의 글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르꼬르뷔제의 Garches 와 Palladio 의 Malcontenta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놀랍게도 두 건축물 사이의 평면 비례, 입면 비례, 옥상의 외관과 역할 등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부분들을 거의 완전한 연결고리로 결합시킨다.

첫째 평면상의 비례에 관한 것이다.

Garches에서는 중심홀이 있고 두 개의 계단실이 있다.

그러나 그중의 하나의 계단실이 Malcontenta의 계단실과 유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90도 각도로 틀어져 있다. 



더욱이 출입홀은 그 바닥의 비대칭적인 개방에 의해서 보여진다....

그래서 Garches에서는 십자형 평면이 단지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Malcontenta에서는 아주 명백한 십자형 축이 있는 반면에, Garches에서는 마지막 벽체의 중심공간(보이드)에 의해서암시된 교차하는 역동성은 함축적으로, 분절된 것으로써 전개되는 것이 허용된다.


둘째는 외견상 보기에 아주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Garches와 고전적인 Malcontenta의 입면상의 유사성에 관한 언급이다.

두개의 주택에 있어서 마루바닥 위로 Piano nobile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테라스나 주랑과 계단들의 상승에 의해서 정원과 연결된다.

Garches에서 정면 출입구는 Palladio의 상부 페디먼트와 등가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상층부의 중심적 요소이다.... 그것은 전체로써 입면에서 대칭성을 고무시키지도 않으며... 평면에서 보여진 중심성에 대한 동시적인 긍정과 부정같은 무엇이 보여진다.

세 번째로 르꼬르뷔제가 주창했던 건축 5원칙 중 옥상정원에 대한 것이다.

Malcontenta에서는 주택의 체적을 증폭시키는 피라미드형의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반면에 Garches에서는 주택의 체적으로부터 려내어진... 바닥을 둘러싸는 것으로서 작용하는 평평한 표면에 의하여 구성된다.

그래서 전자의 건물에서 지붕의 모습은 부가적인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으며 후자는 삭제하는 것으로써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과는 별도로, 양쪽의 지붕들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규칙적인 또는 대략적인 페디먼트나 파빌리온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벽체를 아래의 수직적 표면과 중요한 관계를 맺게하는 것이다.

그림과 같이 보여준다면 이해가 쉽겠지만 필자에겐 아쉽게도 스캐너가 없다.

근대건축과 기능(function)이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뜻하는 중요한 슬로건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일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 슬로건을 기능의 도구적 측면으로 해석하기 쉽고 근대주의 건축의 기능에 관한 비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혁명이후 새로운 건축재료의 출현은 건축가들에게 구조적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가능성에 부딪친 건축가들은 오히려 광활한 사막에 떨어진 느낌이었고, 디자인 과정에서의 수많은 선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줄 어떤 이정표를 찾게 되었다. 

이때 기능은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기계적이라는 의미와 합쳐져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류는 건축을 예술로 보기보다는 과학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건물에 치장되었던 모든 장식을 제거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건축에 있어 효율성, 도구적 기능성, 그리고 경제성과 상반되는 장식은 당연히 배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건축물에 적용되었던 장식적 디자인 원리들을 퇴보시키고 

또한 각 지역 문화마다의 특질과 관계없는 기하학적 단순형태들이 득세함으로써 

디자이너와 사용자간 이해의 괴리를 깊게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기능은 도구적인 의미로 고착화되었고 이로 인해 근대이후 집중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기능에 대한 비판의 주류를 이루는 주장은 건축가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기능에 대한 회의였다. 

즉 건축가가 생각하는 기능과 사용자의 욕구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이너 위주의 건축을 비판한 사람으로 Christopher Alexander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좋은 디자인 원리에 따라 훈련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건물과 도시를 디자인하자고 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점점 하이테크화 되고 있는 현대의 도시나 건축물을 아마추어들이 디자인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충분히 조직화되지 못한 환경에서의 혼란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근대주의가 주장한 기능을 도구적 의미로만 규정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기능에 대한 의미를 확장시키는 몇몇 귀기울일만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르꼬르뷔제의 슬로건인 '살기위한 기계로서 - 집'은 급진적으로 재평가 할 수 있는 훌륭한 기준이다. 

사실상 기계/집 슬로건은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어서 잘못 이해되기도 하고 잘못 인용되기도 했다. 

르꼬르뷔제가 정말로 의도했던 것은 2가지이다. 

첫째는 대량 생산되는 자동차와 같이 값싸고, 표준화되어 있고,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서비스가 용이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계를 닮은 집을 말한다. 



Citrohan이라는 것은 당시 프랑스 유모차 이름을 딴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또 한가지는 상속받은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정직한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디자인 된 것으로서 욕구에 잘맞게 서비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계를 닮은 집이라는 것이다. 



위의 글은 Reyner Citrohan의 것이다. 

또한 미학적 가치에 대하여 기능을 재해석한 예도 있는데 바로 르꼬르뷔제의 Citrohan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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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rohan House Model(1921)은 기술적으로는 그로피우스의 공장만큼 급진적인 것이고, 미학적으로는 Oud의 마을처럼 고상한 건축개념의 완벽한 표현이다. 


거대한 창문, 테라스 그리고 비대칭적인 구성은 Ferro Comcrete의 적용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건축정신을 완전하게 불어넣고 그때까지의 어떠한 건축물이 한 것보다 과거의 관습에서 탈피하는 디자인을 제시히게 되었다. 


앞의 내용들은 기능주의에 대한 경직된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기능을 기계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유모차처럼 아주 편안한 것으로써 모든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적공간으로, 

이상적인 기능을 전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근대건축을 이해하는 데 있어 Banham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기능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론자와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근대건축을 일단 부정한 상태에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지금의 건축과 미래건축의 출발점이 근대건축과는 완전히 분리되도록 강요하는 반면, 후자는 기능과 장식을 같은 선상에서 포용할 수 있는 입장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근대주의가 주장했던 기능에 대한 역효과가 없지 않았으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능은 현대에서도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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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제2005. 6. 19. 20:43

르 코르뷔제의 원명은 샤를르 에두아르 쟌느레로. 

스위스의 작은 도시인 랴 쇼드퐁에서 태어났다. 

코르뷔제의 건축사상은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건축형태의 근원으로서 르 코르뷔제가 응용하고 있는 공간관은 큐비즘과 미래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사물에 일반적 관심을 던져준 큐비스트들과 공간을 인접한 대상물들이 침투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미래주의자들의 공간개념을 코르뷔제가 건축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같은 공간개념과 형태구성원리를 기초로 하여 공간의 볼륨이 구성되며 구성요소로 벽을 선택하며 평면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공간개념은 논리와 이성의 요소들이 감성적이며 미적인 요소들과 하나의 연속적인 복합체로 구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코르뷔제는 도미노시스템이란 구조개념과 모듈러를 통해 근대사회에서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코르뷔제의 건축관이 담긴 작품을 살펴본다.



롱샹교회(Notre Dame du Haut, Ronchamp)









롱샹교회는 코르뷔제의 후반기 작품으로 20세기의 교회건축에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걸작이다. 

이 건물의 지붕은 많이 굽어 있으며, 구조적으로는 이중 쉘로 되어 있다. 

또한 경사진 두꺼운 벽에 나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좁은 실내를 다채롭게 하여 어두움을 느끼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널찍한 느낌을 준다.



사보아 주택(The Villa Savoye)
















사보아주택은 코르뷔제의 근대건축 5원칙인 필로티, 옥상정원, 수평연속창,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디자인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다. 


1층은 필로티로 만들고, 주실은 2층에 배치하여 일부는 선데크로 되어 있다. 

또 램프와 계단을 타고 3층으로 가면 옥상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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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제2005. 6. 19. 20:38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 1965]


프랑스 건축가. 


스위스의 라쇼드퐁 출생. 본명은 Charles Edouard Jeanneret. 고향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건축공부는 거의 독학으로 했다. 

비판적 전위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지(誌)를 창간하여 건축 및 도시계획의 개념을 제시했고 구조와 상관없는 정교한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 맞서 싸웠으며, 기능주의를 옹호 했다. 


《에스프리 누보》에 실린 그의 논문은 《건축을 향하여(1922)》 《위르바니슴(1924)》에서 종합되었고, 또한 구체적인 도시스케일로 계획한 《현대도시(1922)》 《파리의 부아장계획(1925)》 등으로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사상을 만들어 갔다.


실제 제작을 주택 중심으로 한 《에스프리 누보관(館, 1925)》, 《슈투트가르트 주택박람회의 집(1927)》, 푸아시의 《빌라사부아(Villasavoye, 1928∼31)》 등이 알려졌다. 

《빌라사부아》는 석회질로 칠한 흰 벽의 기하학적 형태에 근대건축의 5원칙인 필로티·독립골조·자유로운 평면·자유로운 입면(立面)·옥상정원을 짜넣은 것으로 초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양식을 결정짓는 작품이 되었다. 


1927년 제네바의 국제연맹회관 현상설계에서 그의 응모작이 최종단계에서 심사위원단에 의해 거부된 것을 계기로 근대 전위건축의 가치를 옹호할 조직체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다음해에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의 창설을 추진했다. 

30년대 작품은 파리의 《스위스학생기숙사(1932)》, 파리 교외 《주말의 집(1935)》, 브라질의 《교육보건부 청사(1936)》 등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근대건축국제회의를 무대로 한 도시계획안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제 2 차세계대전 뒤에는 국제연합 회의 사무시설의 기획과 기본설계를 시작으로 마르세유의 아파트 《위니테다비타시옹》, 《노트르담 뒤오성당(1953∼55)》, 《라투레트 수도원(1957)》,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1959)》 《프랑크푸르트 예술관(1963)》 등을 남겼다. 

그의 건축양식은 근대건축운동의 기능주의와 조소적인 표현주의를 결합하여 국제주의 건축의 제 1 세대로 꼽히고 있다.




- 현대 건축의 5형식


필로티(les polotis)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있 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지면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 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성의 결론이다. 

시트로앙 주택계획 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 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 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은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꼬르뷔제는 1929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서 이 같은 구상을 찬란하고 명석한 형태로 실현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53년 낭트 레제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도 이같은 구 상을 관철시켰다.



뼈대와 벽의 기능적인 독립(La Fenetre en Longeu)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앙주택 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vre)

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 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수 있게 처리 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 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 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자유로운 건물 정면(Le Facade Livre)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옥상 정원(Le Toit-Terrasse)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 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이 제기할 수 있다는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같은 옥상 테라스의 초기개념은 이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각지의 유니테다비타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서와 같이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 주거의 4형식


제1형

이 형식은 유기적 이유로 인접물의 옆에 나타나는 각 기관의 연결로 된다. 각기 유기적으로 연결된 매스로써 내부공간의 주위를 그저 그대로 벽면으로 덥는 방법인데 여러 가지 돌출부를 취하여 외부에 보인다. 

이 원칙은 거대한 구성으로 이끌어지나 만일 감시를 게을리 하면 변화의 과잉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 형의 예로는 라 로슈(La Roche)의 집이 있다.


제2형

절대로 순수한 피봉속에 기관을 틀어 넣는 것을 말한다. 

곤란한 과제지만 이것은 아마 정신의 쾌락을 의미한다. 

또 과해진 틀 안에서의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 예로는 가르슈(Garches)의 집이 있다.


제3형

외부로 노출된 독립뼈대에 의하여 단순 명쾌하여 마치 아네트모양 투명한 외피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각 층마다 변화시켜 각 실의 유효한 면적을 그 형태와 수량에 의하여 정할 수 있다. 

극히 용이하며 수단이 풍부한 구성, 예로는 슈터트가르트(Stuttgart)의 집이 있다.


제4형

외부에서는 제 2형의 순수한 형태를 나타내고 내부에서는 제 1형과 제 3형의 특정과 장점이 허용된다. 

순수하고 극히 일반적이며 또 수단이 풍부한 형, 예로는 사보아(Savoye)주택이 있다.




-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적 작품들




Name:Villa Savoye
Place:Poissy
Country:France
Built:1929
Designed:1928


사보아 주택은 1931년 아무것도 없는 푸아시에 있는 넓은 대지에 한 보험업자의 가족을 위해 세운 집이다. 

이집을 지을 때 르 코르뷔지에는 순수한 각기둥의 콘크리트 속에 진정한 건축적 표현을 투사한다. 

엄격한 골조에 따라 배치한 가느다란 필로티 위에 세운 이 집은 '차단막 없이 뻥 뚫린 지붕과 가로로 긴 창이 있는 공중에 떠있는 상자이다'.


사보아 주택은 전쟁중에 파손되고 20여년 뒤에는 토지 수용과 파괴의 협박을 당하다가(학교에 자리를 내주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대대적인 국제적 탄원 덕에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구제되었다. 

그 후인 1964년 앙드레 말로에 의해 사보아 주택은 그것을 지은 건축가가 아직 살아있었는데도 역사 기념물로 분류 되었다. 


'밝은 시간들'이라고 불리는 사보아 주택은 진정한 건축의 선언이다. 

우리는 여기서 건축가의 모든 '어휘'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발언과 논중의 강력한 힘은 '신건축의 다섯 가지 요점'을 실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요 방들은 실내 테라스 겸 정원을 향하고 있다. 

경사로 하나는 지붕겸 테라스겸 일광욕실로 통한다. 

여기서 '건축물에 의한 산책'의 모든 의미가 특히 풍부하게 드러난다.




Name:Chapelle Notre-Dame-du-Haut
Place:Ronchamp
Country:France
Built:1955
Designed:195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종교예술 위원회는 쿠튀리에 신부와 레가메 신부의 주도하에 예술과 건축의 창조적 정신으로 종교건축물의 건설계획을 추진하려고 노력한다. 


1937년에 착공한 아시고원의 성당은 1957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모리스 노바리나가 설계하고 바젠, 라제, 르 모알에게 장식을 맡기기도 했다(1949), 1950년, 마티스는 방스의 로제르 소성당을 구상하고 장식을 맡는다. 


1924년, 벨포르 협로를 내려다보는 롱샹의 언덕 위 보주산맥의 광활하고 수수한 경치 속에 세워진 네오 고딕 양식의 이 성당은 1944년에 폭격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브장송의 대주교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성당의 재건축을 맡기고 싶어 주교좌 성당의 참사원인 라되르와 프랑수아 마테를 급히 그에게 보낸다. 


그들은 르 코르뷔지에와 몇 년 전부터 친분이 있던 쿠튀리에 신부와 함께 르 코르뷔지에를 설득해 설계 책임을 맡기는데 성공한다. 

롱샹을 처음 방문했을 때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수첩'에 연필 스케치를 하나 그렸는데 거기에 훗날 검토하게 될 핵심이 다 들어 있었다. 


이 작은 성당은 다양한 입체가 서로 맞물린 복잡한 건물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방에서 건물을 감싸고 있는 광대한 지평선에 노출된 역동적인 하나의 몸으로 보인다. 


긴 의자와 십자가는 브르타뉴태생의 고급가구 세공인인 조제프 사비나가 조각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성당 부근에 관리인의 집과 순례도의 집도 지었다. 롱샹 성당은 걸으면서 볼 때 그 참모습이 보인다. 

르 코르뷔지에의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도 더 그렇다. 


안에서 봐도 밖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좋은 건축물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걷고', '달린다'. 

그것이 살아있는 건축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기초'를 이루는 빛을 롱샹의 내부로 끌어들였다. 

작게 뚫린 채색유리, 부속성당의 '모자', 지붕 벽 모서리의 '틈'을 통해 빛이 성당 안으로 들어온다.





Name:Visual Arts Center
Place:Cambridge
Country:USA
Built:1964
Designed:1961


미국에 세워진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건축물. 

'시각예술을 위한 카펜터 센터'는 곡선형의 커다란 구조물 두 개와 그것들의 받침점 노릇을 하는 중앙의 정육면체로 이루어져있다. 

건물을 관통하는 S자형 경사로는 학생들을 '건축물에 의한 산책'에 초대하는 것 같다.





Name:High Court(Palais de justice)
Place:Chandigarh
Country:India
Built;1956
Designed:1952


대법원 청사는 거대한 기둥들과 파라솔 평판을 지탱하고 있는 아치형을 기본으로 세워졌다. 

긴 경사로에는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있다. 

복도는 개방되어 있엉 통풍을 원활하게 해준다. 

다양한 색치를 활용함으로써 거대한 기둥이 주는 긴장감과 차양에서 느껴지는 활기가 증대되고 있다.






Name:Maison d'homme(Heidi Weber)
palce:Zurich
Country:Switzerland
Built:1967
Designed:1963


르 코르뷔지에는 예술의 종합을 위하여 여러 건의 별장 설계를 검토했다. 

'인간의 집'(1964)은 강철로 만든 거대한 소라고동 모양의 장식으로 덮인 금속 구조 위에 설계했는데 이집은 하이디 베버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1967년 취리히에 세워졌다.





Name:Palais de I'Assemblee(Assembly)
Place:Chandigarh
Country:India
Built:1962
Designed:1952


인도의 찬디가르 도시계획에서 카피톨에 대규모 공공건물을 집결 시켰는데 완성된 세계의 건물중 하나인 국회 의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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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르꼬르뷔제2005. 6. 19. 19:56

▲ 프랑스 동부 한 작은 마을에 위치한 롱샹교회는 2차대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현대 교회건축에서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 르 꼬르비제에 의해 디자인된 불후의 명작이다. 



프랑스 롱샹의 노트르담 듀 오 교회
Notre-Dam-du-Haut, Ronchamp, France Le Corbusier, 1950-54

"나는 이 예배당을 건축함에 있어 침묵의, 기도자의, 평화의 그리고 영적 기쁨의 장소를 창조해내기를 원했다. 

 또한 이 예배당의 신성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일하게 했다."  

 - 1955년 6월 Monseigneur Dubois 주교에게 보낸 Le Corbusier의 편지에서



이 노트르담 듀 오 교회 일명 롱샹교회의 설계자인 르 꼬르뷰제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프랑스 건축가로서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추앙 받고 있는 건축가이다. 

그는 현대건축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전 세계를 무대로 수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지금까지도 현대건축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0년 전에 완성된 그리고, 20세기 건축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 순례교회 롱샹은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인 건물로서, 현대건축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지금도 세계의 모든 건축가들이 반드시 순례해야 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교회는 프랑스 동부의 작은 시골마을인 롱샹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버린 옛 교회당 자리에 순례자들을 위해 지어졌다. 

교회 부지는 사방으로 멀리 아름다운 시골 풍경들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있다. 

로마시대부터 전략적 방어요충지였던 이 언덕은 성모 마리아를 위한 성당이 봉헌된 지난 4세기 이래로 순례지였다. 

13세기에 다시 채플이 지어졌고, 거기서 일어난 많은 기적의 소문이 지난 7세기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을 유혹하였다. 


이 채플은 1913년에 번개에 의해 파괴되었고 대신 신고딕 양식의 건물을 지었다가 1944년 가을 독일의 공격으로 폭파되었다. 

그 후 새로운 교회를 위한 디자인을 1950년에 꼬르비제에게 의뢰했다.


▲ 내부 예배실의 모습 



2차 대전 후 수많은 교회당의 수리와 건설의 과정에서 프랑스 종교예술위원회(the Commission d'Art Sacre)는 기독교 예술을 회생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이 위원회는 "다루기 쉬운 2류의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피할 수 없는 쓰레기" 대신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꼬르비제에게 이 롱샹의 새 교회당 설계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꼬르비제는 이 제의를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순례지의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기로 롱샹 출생인 루시앙 르뒈( Lucien Ledeur)신부의 끈기 있는 설득으로 결국 수락하였다. 

사실, 그는 사방으로 수마일의 멀리까지 펼쳐지는 부지의 경관에 매혹되었고 이러한 부지의 특성은 그의 최종 디자인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예배당의 목적인 '순례'의 행렬은 그의 건축 공간 디자인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건물의 공간과 형태에 대하여 관찰자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우리는 건물을

"접근하여, 보고, 흥미가 일어나고, 서서 감상하고, 돌아다니고, 발견한다."



건물의 기능과 관련한 프로그램의 요구사항은 비교적 단순했다. 

교회는 예배홀과 3개의 부속 채플들, 순례시기에 야외예배를 위해 사용할 옥외 성소 그리고 파괴된 옛 건물에서 건져낸 '성모 마리아와 아기'의 17세기 조각을 위한 집을 필요로 했다. 

마지막으로 언덕 꼭대기의 물 공급 부족에 대해 물을 모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따라서 롱샹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롱샹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경관 속에 하나의 작은 오브제로서 인간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 장소가 가진 역사의 기념비이었으며 인간의 새로운 역사의 흔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샹이 건축일 수 있음은 그 형태가 기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롱샹은 하나의 사다리꼴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이를 곡선화하고, 기능과 형태에 따라 적절히 부가되고 분절되면서 비대칭적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롱샹은 곡면을 이루며 깊은 처마를 가진 지붕과 그 지붕을 받치는 두껍고 경사지고 곡면을 이루는 벽체. 그리고 수직의 탑 등 3개의 요소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지붕은 교회당 뒤로부터 앞쪽으로 벽과 함께 상승하여 교회의 전면 모서리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건물 전면의 오른쪽 끝의 주 출입구 옆에 세운 큰 탑과, 건물 후면의 입구 양쪽에 서 있는 보다 작은 2개의 탑 등 3개의 탑은 이 건물의 수직적 요소로서, 벽과 함께 육중한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한다. 

이처럼 상승하는 지붕의 곡면과 벽체의 곡면은 그 내부의 예배 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3개의 탑들은 내부에서 예배홀에 부가된 크고 작은 기도실로 만들어져, 형태와 내부의 공간을 일치시켰다.

조개껍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지붕은 두개의 쉘(shell) 형태로 만들어졌고 곡면으로 길게 들어올려진 처마로 인해 대단히 육중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평면상으로도 곡선인 벽은 위로 오르면서 안으로 경사지고 지붕을 따라 상승한다. 따라서 지붕과 벽은 서로 하나로 통합된다.



벽의 두께와 경사는 상승하는 육중한 지붕의 무게감에 대해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지붕과 벽의 곡면은 언덕이라는 지형적 특성에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조각적인 형태들은 신석기 시대의 돌맨(dolman)의 강력한 힘과 필연성을 연상시켜 건축의 근원적 뿌리로부터 솟아 나온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그가 젊었을 때 방문하였던 비잔틴 미술과 희랍의 아크로폴리스의 영향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 평면도, 내부투상도


이러한 형태의 구성은 근대건축의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던 콘크리트라는 구조재료의 덕택이다. 

액상(液狀)의 콘크리트를 부어넣을 형틀만 만들면 어떤 형태든지 만들 수 있는 콘크리트의 가소성(可塑性)은 롱샹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대부분의 건축물을 가능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샹의 성과는 이 건축가가 재료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지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벽은 그의 말대로, "불합리하게, 그러나 실용적으로 두꺼운" 벽으로 어떤 곳에서는 3m가 넘는다. 그 깊이는 내부의 기둥들을 감춘다. 지붕은 벽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벽과 지붕 사이에 좁고 가느다란 틈을 만들었다. 벽 속에는 이전의 교회에서 수집한 깨진 기와조각들로 채워졌고, 벽의 표면은 콘크리트로 안팎을 뿜칠하여 거칠고 우둘투둘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롱샹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보는 장소마다 다양한 이미지와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수목 사이로 난 좁은 언덕길을 따라 교회를 향해 올라가면, 그 길 끝에서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까이서 처음 드러난다. 

여기서 본 롱샹의 모습을 담은 히렐 쇼켄의 여러 장의 이미지 스케치들은 수녀의 모자나 배 또는 기도하는 손, 어린 아이를 감싸 앉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롱샹의 형태에 대한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롱샹은 매우 원형적이고 정체를 알 수 없어서(enigmatic) 그것은 과거와 환경과 신앙 등 모든 영향들을 흡수하여 전혀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복합적인 건축적 경험이다.

그래서 외부와 내부, 지붕과 벽과 탑들, 앞과 뒤와 양 옆 모습들의 상호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그 건물의 주위와 안을 통하여 돌아다니며 시각적 체험의 여행을 하여야 한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례교회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순례자는 교회당을 오른쪽으로 돌아 북측의 입구를 향해 걸으면서, 끝없이 흐르고, 변화하며, 발전해 가는 교회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롱샹의 우수성은 다양한 요소들의 스케일의 연출과 모듈러에도 있다.

24.7m x 12.8m의 아주 작은 내부공간을 포함하는 이 기념비적인 건축은 그 구성 요소들에 따라 다양한 스케일로 구사되었다. 그는 그중에서 예배홀에 부가된 아주 작은 채플들과 창들 그리고 지붕 같은 몇 개의 요소들을 압도적으로 크게 만듦으로써 절묘한 공간적 긴장감을 부여했다.

"나는 방문자가 건물의 다른 부분들의 스케일을 쉽게 예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 말했듯이 그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샹의 모든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건물의 모든 요소들의 크기가 인체의 스케일과 황금비에 기초하여 만든 그의 모듈러에 의해서 구성된 비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기도실 상부 



내부 공간은 약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홀과 예배홀의 좌측과 후면에 부가된 성물실 및 3개의 작은 기도실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홀은 성소 측으로 갈수록 폭이 더 넓어지는 사다리꼴 평면이고, 천장도 성소 쪽으로 부드럽게 들어올려져 있어 회중석과 성소가 더 가까이 그리고 개방적으로 느껴진다. 


더욱이, 성소와 회중석의 구별을 없애고 ‘하나의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교회의 본질인 통일성과 예배의 민주화를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곡면을 이루어 볼륨감을 가진데다 거친 표면으로 인하여 더욱 육중해 보이는 어두운 천장과 거칠은 텍스츄어로 마감된 두꺼운 벽 그리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예배홀을 마치 로마시대의 카타쿰을 연상시키는 동굴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홀은 빛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천장을 벽에서 살짝 띄워 벽을 따라 길게 난 수평의 틈을 통해 빛을 유입시킴으로써 육중한 천장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두꺼운 남측 벽에 자유롭게 뚫린 작고, 깊고, 여러 가지 색깔로 채색된 수 많은 창을 통해 내부로 발산되는 빛들은 예배 공간에 신비한 빛의 효과를 연출한다.




▲ 다양한 이미지 스케치 



예배홀에 열린 알코브 형식으로 되어 예배홀을 공간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크고 작은 3개의 기도실은 높이 솟아있는 수직의 공간으로, 상부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빛이 거칠게 마감된 곡면의 흰 벽을 타고 내려옴으로써 기도실을 신비한 공간으로 만들고 저절로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한다.

채플의 가구들도 꼬르비제에 의해 모듈러를 기초로 하여 디자인 되었는데, 지붕과 벽, 바닥의 동적인 선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기하학적이어서 현저하게 대조적이다. 


제단은 석재로 만든 단순한 정방형이다. 

걸상들은 콘크리트와 목재로 만들었다. 

주철제 성찬난간은 교통 차단기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가벼운 시각적 조크인 듯하고, 바닥은 격자 패턴으로 강한 인상을 준다.


작은 색 조각들은 단색조의 내부공간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깨끗한 색 유리는 무늬진 정방형의 빛을 떨어뜨린다. 

벽 속에 상자처럼 만들어진 몇 개의 창들에는 건축가의 그림과 손으로 능숙하게 휘갈겨 쓴 경의의 단어들이 새겨져 있다.

남측의 폭 3m의 정방형 철제 출입문은 그 중심에서 피봇트 힌지로 움직이는데 그 양면에 꼬르비제의 자연의 추상적 모습(별, 구름, 강, open hand)들이 밝은 색깔의 에나멜로 그려져 있다.

이 교회에 특별히 디자인된 또 하나의 공간은 외부에 있다. 

이 공간은 매년 2번씩 축제일에 모이는 수천명의 순례자들을 위해 예배당 동측에 넓은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야외예배 공간이다. 

야외예배를 위한 성소는 동측으로 길게 내 뻗은 예배당 지붕의 처마 밑에 내부 성소의 외벽을 배경으로 설치되었다. 

여기에 제단과 성소 낭독대 그리고 지붕을 받치는 또 하나의 반 원통형 벽에 매달린 설교단이 성소를 구성하고 있다. 


내부 성소와는 작은 문을 통해 연결된다. 내부의 제단 벽 상부에 사각형 구멍을 뚫어 설치된 성모상은 이 야외 예배당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외부에 설치된 또 하나의 오브제는 서측 후원에 설치된 목제 종탑인데 낮으막한 높이에 3개의 종이 달려 있어 중세의 높이 솟은 종탑과는 대조적이다.

롱샹의 건설은 3년의 격렬한 반대 끝에 1953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어지기도 전에 교회의 차고(車庫), 핵 대피호 또는 콘크리트 덩어리라고 모욕적인 비난이 있었고 따라서 완성되었을 때 많은 소란이 예견되었다.

롱샹이 완성되었을 때 많은 건축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과거 40년 동안 선도해왔던 근대주의 건축이념의 모든 것에 모순되어 보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당시의 건축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어떤 이는 롱샹의 이런 비이성적인 형태와 정직하지 못한 구조를 근대주의 운동에 의해 신봉된 엄밀한 기능주의를 배신한 것으로 비웃었다. 


그 지도적인 건축가인 꼬르비제가 스스로 집은 살기위한 기계다.”라고 선언한 일이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은 롱샹을 근대주의의 엄격한 형태에 의해 너무 오랫동안 질식된 건축을 위한 자유의 찬가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비난과 찬양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 롱샹 교회당이 20세기 전반의 교회건축들이 중세 고딕양식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학자들과 건축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수많은 시도들의 결정체로서, 현대 교회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었다. 


또한, 롱샹은 현대건축의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으며 지금도 신앙의 순례자 이상으로 수많은 건축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훌륭한 작품은 결코,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고 영원히 아름답게 존재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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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골과 콘크리트



‘철골건물과 콘크리트 건물을 동시에 지으면 어느 것을 빨리 지을 수 있나?’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철근콘크리트 건물보다 철골건물(또는 철골철근콘크리트 건물)을 훨씬 빨리 지을 수 있다’라고 대답한다. 학생이건 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이건 간에 심지어는 경험이 아주 많은 시공기술자들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경우에 따라서 콘크리트건물이 빠를 수도 있다’이다.

또 한 가지 질문은 ‘철골건물과 콘크리트건물 중 어느 것이 지진에 강한가?’라는 것으로서 이 물음에도 역시 대답은 대부분 철골건물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경험이 많은 기술자들도 가지고 있는데 최근의 고급아파트 분양광고에 ‘콘크리트건물에 비하여 내진성능이 우수한 철골철근콘크리트건물 등’을 운운하는 문구가 있을 정도로 일반상식화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건축에 문외한인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건설기술자들까지도 ‘철골건물은 고급건물이고, 내진성능이 우수하다’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지만 여기에 대하여 차근차근 짚어보기로 하자.



먼저 철골건물이 콘크리트건물에 비하여 시공속도가 빠른가 하는 문제로서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건축물에 작용하는 하중과 저항방식에 대하여 간단히 짚어보자. 일반적인 고층사무실 건축물의 예를 들어 힘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축하중(Gravity Force)의 경우는 바닥슬래브에서 보(Beam & Girder)를 따라 기둥으로 전달되어 기초에 도달하고 횡하중(Lateral Force)의 경우 우선 풍하중은 외벽에서 바닥슬래브를 따라 코어(Core)와 기둥과 보의 라멘구조부분에 전달되어 코어와 라멘구조가 지지해주고 지진파가 건축물에 작용할 때는 횡하중에 대하여 라멘구조와 코어부분이 분담하여 저항한다.

이러한 구조방식이 보편적인 고층건축물의 구조방식으로서 초고층 건물일 경우 튜브구조(Tubular System)를 채택하기도 하고 초고층이 아니라면 철골라멘조(코어가 없이 기둥, 보, 슬래브의 철골라멘구조가 횡하중에 저항하는 방식)로 시공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구조는 코어벽체구조이다. 즉 초고층 건축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층건축물은 철근콘크리트구조로 하건 철골철근콘크리트구조로 설계하건 횡력에 저항하는 방식이 전반적으로 코어와 라멘이 횡력을 분담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조의 공사기간을 생각해 보자. 코어벽체구조의 건축물은 구조재료가 철골이던지 콘크리트이던지 간에 골조공사의 공기는 바닥이나 보의 시공기간이 아닌 코어의 시공기간이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코어 부분은 골조공사에서 가장 까다로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샤프트와 같이 복잡한 구조가 많기 때문에 기둥이나 보의 골조보다 공사물량이 적다하더라도 일은 훨씬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이러한 이유로 코어구조방식으로 설계된 철골건물과 콘크리트건물의 골조공사기간을 비교해 보면 실제로 철골건물의 공사기간이 더 길어진다. 콘크리트건물의 경우에는 거푸집을 설치하여 콘크리트를 타설하면 골조공사가 완료되지만 철골건물에는 철골공정이 있으므로 철골조립이 아무리 빨리 진행되더라도 코어가 완료되지 않으면 후속공정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철골건물은 건물의 뼈대(철골)가 하루게 다르게 위로 올라가므로 철골건물의 골조공사도 훨씬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한참 아래에서 기둥거푸집과 코어거푸집이 따라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어떤 분들은 코어는 천천히 시공하고 슬래브만 먼저 콘크리트타설해서 올라가면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철골로 짓는 건물은 외벽과 코어의 작업량이 가장 많다.


엘리베이터, 화장실, 공조실 등 가장 복잡한 공정이 코어 부분에 몰려 있으므로 코어가 시공되지 않으면 결코 건물을 빨리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콘크리트조로 건물을 지으면서도 공사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예는 미국과 유럽 등에 그 기록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의 시공기록과 비교해 볼 때 상상을 초월하는 사례를 든다면 ‘60층 정도의 고층아파트 건물을 12개월에, 60층 오피스건물을 24개월에 토공사에서 입주까지’하는 등 그 사례도 매우 많고 한동안 세계 최고층건물이었던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1930년대에 14개월 미만의 공기로 지어진 정도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철골조의 건물이 콘크리트건물에 비하여 공기가 단축된다는 것은 철골조립의 진행상황만을 보는 시각에 기인하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철골건물이 콘크리트건물보다 빨리 시공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설계되는 구조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앞서 말한 코어방식의 철골건물이 콘크리트건물에 비하여 결코 빠를 수 없다고 했는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코어벽체 없이도 횡력에 저항할 수 있는 구조로 시공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코어벽체가 없는 건물은 다른 부분이 코어의 기능, 즉 횡력에 저항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그 대안으로서 철골기둥과 거더가 강접합(Moment Connection)으로 연결되어 이것만으로 횡력에 버티는 방식이면 될 것이다.

이 경우는 철골부재의 조립이 진행되는 속도에 따라 바닥슬래브의 콘크리트만 타설하면 되므로 철골 조립속도를 매 층당 3일에서 4일정도(철골 1절당 10일 내외)로 가정한다면 이론상으로는 이 속도로 골조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초고층건물에서는 불안정한 구조물이 될 것이고 기둥과 거더 등의 부재단면이 매우 커지므로 비경제적인 구조설계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철골구조 내에 철골로서 콘크리트코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구조체를 설치하여 이 구조체가 횡력에 저항하는 방법도 가능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의 물음 중 다른 하나로서 과연 철골건물이 콘크리트에 비하여 지진에 더 안전한 건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건축물이 지진에 대하여 저항하는 방법은 내진이라는 방법과 면진이라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지진에 대하여 건축물이 강하게 버티는 방법이고 후자는 지진이 건축물에 미치는 충격을 줄이는 방법이다.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는 것이 효과적인가 또는 우수한가 하는 것은 아직 검증된 것은 없지만 내진구조는 오래 전부터 적용해 왔던 방법이고 면진구조는 비교적 최근에 일본을 중심으로 개발.적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내진구조는 철골건물이건 콘크리트이건 모든 건축물에 채택될 수 있고, 면진구조는 방식의 특성상 철골건물에 적용할 때 유리한 구조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반적으로 콘크리트건물이나 철골건물에 내진구조를 채택하고 있는 실정이며, 십 수년 전부터 고층건축물의 내진구조설계가 의무화 되어 있어서 콘크리트건물도 지진에 안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진이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은 건물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커지므로 콘크리트건물이 철골건물에 비하여 골조구조체의 중량이 무겁기 때문에 철골건물보다는 지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 전체의 중량으로 볼 때 반드시 콘크리트건물이 무겁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건물내 칸막이벽 재료의 종류, 바닥마감공법 등과 같은 마감공사의 공법과 재질에 따라 건물의 자중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진이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골조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도 좋지만 경량재료의 사용, 마감공법의 건식화, 마감공사의 단순화 등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콘크리트건물의 골조자중을 더욱 줄인다면 콘크리트건물도 철골건물에 비하여 가벼워질 수도 있다. 그 방법으로는 먼저 콘크리트의 강도를 증대시켜 기둥과 벽체의 단면크기를 줄일 수 있고, 기둥은 콘크리트로 시공하되 거더나 보는 철골과 콘크리트를 합성한 복합구조를 채택한다면 가능하리라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편견, 즉 철골건물이 콘크리트건물에 비해 지진에 안전하다라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 사례로서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미국 동부지역에서는 초고층건물이 철근콘크리트조로 시공되는 사례가 매우 흔하다. 그리고 현재까지 지어진 건물들의 지진피해를 볼 때 사실 철골구조라 해서 그리고 철근콘크리트건물이라 해서 지진발생시 피해의 적고 많음에 관한 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철골건물이 너무 쉽게 지어지는가!
사실 20층 정도되는 건물을 철골조로 시공하는 나라는 미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철골재료비가 싸고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생산성과 원가경쟁력을 보유한 P제철이라는 회사가 있기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수년 전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현장에서 근무할 당시 그곳에는 초고층건축붐이 한창이었는데 당시에 필자가 근무했던 현장의 60층 오피스건축물도 콘크리트건물이었고, 현재 세계 최고높이의 건축물인 KLCC빌딩도 당연히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이다. 일부 보의 스팬을 크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철골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주변에서 지어진 많은 초고층 건물에 철골이 사용된 곳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물론 지진이 없는 곳이라서 내진설계에 관한 기준이 우리나라보다는 느슨하지만 이러한 초고층건축물에는 풍하중이 지진보다 더 크게 작용하므로 건축물을 약하게 설계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말레이시아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 태국, 홍콩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럽은 어떠한가. 최근 선진국에서 초고층 건축물의 신축현장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지만 초고층건축물의 신축이 한창일 때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철골조를 도입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콘크리트조의 건물을 많이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철골값이 콘크리트보다는 비싸기 때문이며, 철골은 화재에 약하고 바람에 의한 건물의 진동이 매우 커서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 진동을 느낄 정도의 단점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콘크리트건물에 비하여 비싸고 구조적으로도 특별히 탁월하다 할 수도 없는데, 우리나라에서 철골건물이 흔하게 지어지는 이유는 건축주를 비롯한 일반인들의 인식과 철골로 지어야 비싼 건물이고 콘크리트건물은 싸구려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다른 나라에 비하여 콘크리트에 대한 기술개발이 부진하고, 고강도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다. 다른 나라는 500kg/cm2정도의 콘크리트를 아무런 부담없이 사용하는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300kg/cm2만 넘어가도 심의를 통과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건축시공기술자들만이라도 콘크리트건물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최소항 ‘철골건물=고급건물, 튼튼한 건물’이라는 생각은 버리도록 하자.


출처 : 건축, 사람과 현장/이경섭/기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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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호텔 (帝國ホテル, ていこくホテル)




국보숙박시설(國寶宿泊施設)로 구상(構想)되어 초대(初代)는 1890年에 준공(竣工). 1917年기공(起工), 23年준공(竣工)2년째의 건설(建設)은 미국인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アメリカ人フランク=ロイド=ライト)가 설계함.


http://www.pbs.org/flw/buildings/imperial/imperial.html



Frank Lloyd Wright 
미국 1869~1959.


라이트는 유럽 중심의 근대건축의 흐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유럽건축에 영향을 끼친 미국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통하여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이며, 기하학적인 수평선과 자연의 조화, 내부공간의 리듬, 반복과 대립의 적절한 구성 등 현대건축의 중심언어를 훌륭히 사용하였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으로는 수잔 로렌스 다나주택, 찬레이주택, 라이트 스튜디오, 윈슬로주택, 로비주택, 윌리츠주택, 마틴주택, 이사벨로버츠주택, 쿤레이주택, 야하라보트클럽, 유니티교회, 라킨빌딩, 미디위이가든, 동경제국호텔, 홀리호크주택, 엔니스주택, 프라이스타워, 낙수장, 존스왁스 빌딩, 탈리아센 웨스트, 하비아곳주택, 랄프제스트주택, 모리스상회, 구겐하임미술관, 마린 시빅센터외 800여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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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e House - frank lloyd wright

Chicago,Illinois,1909

= Robie House =




A. 일렬 주택의 평면: 


십자형 주제에 관한 변형이며, 그의 가장 중요한 주거용 평면 유형 중의 하나이다. 

일렬 주택의 평면은 기준선에 의해 확립된다. 

이러한 수평축은 기본적인 세로 면적의 배치를 결정하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부수적인 횡단축을 이룬다. 


그것은 디자인을 촉발시키며 그 개발에 대한 조직상의 보강재가 된다. 

로비주택은 아마 라이트의 가장 유명한 주거 디자인 일 것이다. 

그것은 충분한 사건을 일으키는 드라마와 매력적인 통합을 지니며, 특성을 상세히 설명하고 다른 저항할 수 없는 단일성에 비례를 부여한다. 


이 주택의 꾸준한 수평적 구성은 디테일의 모든 단계에서 반복된다. 돌출 지붕, 상처난 로마식 벽돌, 외팔보 테라스, 연속적인 석조 갓돌벽, 그리고 연속된 띠모양의 창은 운동 심지어는 공중으로 부유하는듯한 동적 감각을 부여하고 있다.




B. 벽체의 배치형태와 상호관입


창과 문으로 등으로 뚫려진 전통적인 벽체는 연속적인 창문이 이루는 연속적인 띠에 의해 지붕과 분리된 분절되지 않은 판넬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 외부 공간이 막힘 없이 상호전이가 되도록 처리되었다. 


또한 벽체의 배치에 있어서 2개의 큰 볼륨을 형성하는 벽체를 서로 엇갈려 배치함으로써 2개의 외부 공간이 형성되었는데, 하나는 가로를 면한 자동차를 위한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후면에 보행자를 위한 공간으로 처리되었다. 

로비주택에서 벽체의 중첩으로 벽면이 가지는 일반적인 속성인 공간을 폐쇄하고 한정하는 역할보다는 내 외부의 시각적, 공간적 연속성을 조절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C. 볼륨


2개의 좁고 긴 볼륨이 마치 서로 어긋난 조각처럼 위치해 있는데, 주 공간들을 포함하고 있는 큰 부분은 가로쪽에, 서비스공간과 차고를 포함하고 있는 작은 부분은 후면에 위치해 있다.

이 두 볼륨이 어긋나게 미끄러지면서 뒤쪽으로 나가는 입구 복도가 생기며, 입구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게 된다. 


큰 볼륨은 거의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 독립적인 벽난로를 갖고 있다. 2개 층에 걸친 서비스 공간이 이 중심 볼륨에 비대칭적으로 부가되어 있다.




D. 창문
외부에서 볼 때 정원벽, 테라스, 발코니, 지붕처마 등이 만들어 내는 강한 수평선들은 벽체의 연속적이고 짧은 수직선들과 강한 대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E. 기둥
몇단 후퇴된 모서리 부분의 짧은 기둥을 모서리에 배치하여 돌출 시킴으로써 눈에 띄는 수평선과 강한 대조를 이룸과 동시에 내 외부에서 강한 디자인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외부에서 볼 때 극적으로 뻗어 나가는 돌출된 수평선들을 정착시키고 함께 결속시켜 주는 벽난로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interior & exterior



ground floor




prow




the strip windows of the living room





living room





living room toward the fireplace





dining room toward the stairwell





p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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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ggenheim (1943-1959) **


2차 대전 후 건축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라이트는 그의 작품 경력 중 절정에 이루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완성하였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의 건물들 중에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지구랏트, 계단 피라미드, 나선형 첨탑 등의 형태를 연상시켜주는 거대한 중앙집중식 볼륨을 가지고 있으며 상반된 2개의 가치를 구체화하여 전달한다. 

또한 완벽한 보안과 연속적인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이 건물은·미국의 민주주의적 신화를 기념한 기념비적인 것이기도 하며, 공간적 연속성의 마무리를 통해 물질이 아닌 공간이 총체적 현실로 인식된다. 

하나의 중심적인 개념에 의해 건물의 내용과 형식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사로를 통로인 동시에 전시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기능면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대형 내부공간의 확산을 위한 천창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겐하임 미술관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 건축의 랜드 마크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의해 설계된 솔로몬 구겐하임은 아래보다 상부가 넓은, 나선형의 원통형 흰색 콘크리트 건물과 간소한 육면체의 건물, 16층의 정방형 격자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라이트는 맨하튼의 직선적인 건축 형태나 미술관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모두 깨트리길 원했고, 결국 '정신의 전당(temple of spirit)'으로서 곡선적이고 연속적인 공간을 실현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향후 미술관이 수행할 건축사적 역할을 선언한 셈이 되었다. 


부분적인 벽면을 제외하고는 유리창이 전혀 없는 원통형 건물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연결된 궁륭의 유리 천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자연광이 바닥까지 비치며 아래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360도로 활짝 열린 실내의 공간감이 몹시 시원하다. 

이 달팽이 모양의 공간은 작품 전시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별관 건물과 소호의 분관을 열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고, 오히려 건물 자체가 관광객 유치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939년 설립된 구겐하임(Guggenheim) 미술관은 지난 60여 년간 주로 비구상계열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현대미술의 흐름을 일반 시민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설립자 솔로몬 R. 구겐하임은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광산재벌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추상 회화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937년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을 설립하였고, 뉴욕 이스트 54가에 비구상회화 미술관(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으로 처음 미술관 문을 연 이래 1952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개명하였으며 1959년에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의 설계로 뉴욕에 '정신적 성전'을 표현하는 둥근 로툰다 미술관을 건립했다. 


달팽이 모양의 외관과 나선형 계단으로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관람객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오면서 벽에 걸린 전시작들을 둘러 볼 수 있게 만든 파격적인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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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수장 **


1935년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피츠버그 백화점 사장을 위해 세운 낙수장은 라이트가 만든 것 들 중 가장 시적인 건축으로서 라이트의 로맨틱한 신념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낙수장에서 사용된 주요 요소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슬래브로, 천장 역할과 바닥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돌인데, 내외부의 석벽과 바닥은 시멘트와 대조적인 조화를 이루고, 마지막으로 유리막이 부여 되었는데, 이것은 연속 된 유리막 가운데 있는 고정 유리창과 결합되어 있다. 

이 유리 커튼 월이 낙수장의 세 번째 주요 요소이다. 낙수장이 지형의 경사에 따라 한 층씩 뒤로 물러나 앉아 있듯이 유리막 또한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져 있고, 거실 주변의 유리막은 내부 공간의 구석마다 있는 기둥이 없이 3면이 연속해서 펼쳐져 있다.


라이트는 조용하고 한적한 생활 방식을 조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의 환경을 온전히 보존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테라스-정원-땅을 단순하게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융통성 있고 잘 통합된 어떤 것이 요구 되었다. 

그리하여 낙수장의 각 실들은 거의 다 외부와 연속되어 있으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연과 접하고 있다. 


그의 습관처럼 내외부 공간 사이에 어떤 차이나 변화를 주지 않았고, 바닥도 문턱 없이 이어지며, 낮은 천장들은 더 낮아지기도 하고 계속해서 바깥으로 이어져 평 처마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자연광의 변화와 식물과 공기의 계절적 변화가 어우러져 낙수장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라이트는 내외부가 하나 되게 하는 공간의 연속성과 내외부 공간에 사용되는 재료의 일관된 연속성(바닥, 벽, 천장)을 강조하였다.




람 사는 기본 공간 형식은 자연과 함께 하는 단독주택이다. 

원시의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다 각자의 집을 가졌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시 주거가 서서히 공동주택으로 바뀌고 엘리베이터의 발명으로 수직 동선이 건축에 도입되면서 고밀도 집합주거가 등장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화가 가속되고 도시 주택의 대부분은 공동주택이 되어가고 있다. 라이트의 대표작인 ‘낙수장’은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인간 공간의 원형을 아름다운 자연과 인공의 공간 형식으로 보여주는 20세기 최고의 집이다.

낙수장은 라이트가 69세 되던 해에 완성되었다. 푸른 하늘과 숲과 물 사이에 불세출의 천재가 만든 그 모든 것을 합한 ‘인간의 공간’이 폭포 위에 세워져 있다. 


폭포 위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폭포에 이르는 개천 위의 다리를 지나야 한다. 

다리를 지나 아래쪽 복도를 지나야 현관이 나온다. 현관에서 좌측으로 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펼쳐진 테라스가 있는 거실이 나타난다. 


거실 한구석에 땅에서 솟은 듯한 벽난로와 부엌이 있고 부엌은 철제 창틀을 통해 후원으로 열린다. 

2층에는 세 침실이 있는데 모두 각자의 테라스를 갖고 있고 3층에는 욕실과 테라스가 딸린 큰 방이 하나 있다. 

벽난로와 부엌에 의한 수직 부분이 자유로이 부유하는 테라스를 암반에 고정시켜 자연의 연속 속에 건축형태를 폭포로 상징되는 자연의 힘과 조화되도록 만들었다.




양 건축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현대 건축의 이름으로 라이트는 서양건축사가 이루지 못한 자연과 혼연일체 된 동양적 건축 미학을 서양 현대 건축에 보여주었다. 


자연의 흐름을 건축에 담는 초기의 주택 작품들인 대평원의 집(Prairie House)에서 꽃을 피운 그의 천재가 한동안 일본 문명과 아메리카 문명에 몰두하다가 69세의 나이에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큰 것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낙수장이라 불리는 카우프만 하우스(Kaufmann House)다. 


낙수장에서 자연은 건축과 대립되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이 자연스럽게 건축 공간이 되고 건축 공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상호교감을 연출하고 있다. 

그가 유기적 건축의 최종적 요소로 말하던 건축과 인간의 진정한 상관을 뜻한다. 


그의 건축 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다시 알게 된다. 

그는 주택 작품만이 아니라 공공건물에서도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수장(Falling water, 1935∼1939년 건설)은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라이트(F. L. Wright, 1867∼1959)가 설계한 대표작으로 개인 별장형태의 주택이다.

피츠버그에 있는 이 낙수장 건물이 최근 들어 캔틸레버 형태(길이:4.57m)의 지붕이 아래로 처지고 있어 라이트의 명성에 오점이 되고 있다. 


뉴욕의 구조전문가 로버트 실먼(Robert Silman)에 의하면, 낙수장 건물의 구조적인 문제는 건설당시 건설업자가 지적한 철근 량의 부족을 설계자인 라이트가 받아들였더라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택구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콘크리트 캔틸레버는 1997년도에 최초로 구조적인 부실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술자들은 철제빔을 동원하여 캔틸레버를 받쳐 놓았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거실바닥 한복판에 욕조 배수구만한 크기의 구멍이 났다'고 보도했고, 이 건물의 관리자에 의하면 균열이 계속적으로 늘어가고 있다고 했다.


만약 이 건물이 붕괴된다면, 마치 돌을 포개어 놓은 선반 같을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자연과의 친화'로 유명한 이 주택의 마지막이 아이러니라고 소개하였다.

구조기술자인 실먼은 영구적인 대책으로 '포스트텐셔닝 공법'을 제안하고 있다. 즉, 콘크리트 구조체에 구멍을 낸 뒤 고장력 강선을 삽입하여 긴장시켜 쳐진 부분을 원상회복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낙수장 뿐만 아니라 라이트의 주요작품 중 하자가 발생한 몇 가지가 있는데, 이 중 하나로 플로리다 남부대학(Florida Southern College)의 포크카운티 사이언스 빌딩을 들 수 있다. 


현재, 이 건물은 1996년에 콘크리트 블록에 손상이 발견된 뒤 1,000만불을 들여 영국의 John McAsan사에 의해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15ft(4.57m)길이의 캔틸레버가 쳐진 것에 대한 영구적인 보강법을 검토하기 위해 3명의 건축가, 3명의 엔지니어, 1명의 건축재료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적인 위원회가 열려 최종적으로 '포스트텐셔닝공법' 으로 결정되었다.

1930년대 라이트의 대표작을 원상 복구하는데 7백만 불을 투입하여 2년 내에 착수하기로 했다. 


라이트의 아들인 에릭까지 참가한 지난 4월 10일 피크버그에서 열린 회의에서, 위원들은 1997년에 캔틸레버 하부에 설치된 강제 지주를 제거하고, 영구적인 보수가 될 수 있는 프스트텐션 케이블을 설치하는데 합의를 하였다. 


라이트 설계의 주요점은 캔틸레버로서 지주를 받쳐 놓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실패작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영구적인 보강법의 설계는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로버트 실먼사가 맡는다고 한다. 


강케이블은 건물의 주부재인 보의 양측을 따라 설치되고, 처짐이 없는 상태, 즉 당초 거푸집을 제거했을 때의 상태까지 케이블을 설치 할 것이다. 이 보수보강공사의 비용은 공공재원이 아닌 민간차원에서 조성된 복구기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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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




약력

- 1867 출생

- 1885 위스콘신 대학 입학

- 1887 대학 중퇴 평생 스승인 루이스 헨리 셜리반 사무소에 들어감.

- 1893 시카고에 자신의 사무실 개설.

-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일본과 동양의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함.

- 1893~1910 제 1 황금시대. 자연과 대지에 융합한 전원주택을 설계한 시기.


- 윈슬로우 주택, 로비 주택, 라킨 빌딩, 유니티 교회 등

   1911~1935 침묵의 시기. 

   해외 도피 및 은둔 생활로 작품 활동거의 없었음.


- 미드웨이 가든, 일본의 제국 호텔, 탈리아신 이스트 등

   1936~1959 제 2 황금시대. 20여년의 공백 기간을 깨뜨리는 명작을 남김


- 낙수장, 존슨 왁스 회사, 구겐하임 박물관 등

- 1959 사망.(당시 91세)





'신의 주택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쉽게 확장될 수 있고, 그곳 자연이 근사하다면, 그곳의 환경과 호흡을 같이 하도록 하게 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축물이 마치 그러한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그 장소에서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라.'

'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



든 시대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건축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은 건축가들로부터 최고의 건축가로 인정받는 사람은 단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다. 

작품과 그에 대한 논문과 저작만도 거의 2천개가 넘는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어느 누구도 겨룰 수 없을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던 그의 라이프스타일과 여성 편력은 아메리카의 유명한 스캔들이었다.

그는 건축가로 태어나서 건축가로 키워졌다. 

어린 시절 그는 바흐와 베토벤을 즐겨 연주하던 아버지와, 그를 임신하였을 때부터 그를 건축가로 키우려 하였던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부의 재능에 더하여 인생을 통한 끊임없는 건축에의 헌신으로 과거의 역사 건축과 다른 특유의 20세기 문명의 건축을 만들었다. 

불후의 걸작인 낙수장(Falling water)과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은 인류가 이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건축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건물은 다른 예술처럼 영속적이지 못하다. 

건축은 필요에 의해 시작된 만큼 필요가 없어지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이트가 지은 484개의 건물 중 75개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가장 많은 건물이 살아남아 있는 건축가이며 아마도 앞으로 그의 건물들은 오히려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미 그의 건축은 역사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트는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된 유럽의 이민 국가 미국에서 독자의 문명을 구축하고 유럽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미국 작가다. 

라이트의 건축은 유럽 건축에 깊고 넓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문명과 일본을 통한 오리엔트 문명을 미국 문명과 접속시켜 이전의 어느 건축가도 이루지 못했던 자연과 교감하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을 창출하였다.

그는 20세기 문명이 만든 콘크리트, 철골, 철근 콘크리트, 금속판, 판유리, 그리고 플라스틱 등으로 인류가 이루지 못했던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내었다. 


이들 재료를 통해 건축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며 특이한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최근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자연 친화적 건축이 나오기 전 그는 이미 1894년 처음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유기적 건축’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는 자연의 생명체와 같은, 주변과 교감하는 살아 있는 건축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건축을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하나가 되게 하는 유기적 건축을 만들고자 하였다. 

시간이란 말은 건축이 만들어지는 시대정신을 뜻하는 것이므로 그의 건축은 과거 건축의 반복이 아닌 끊임없이 진전하는 문명의 언어이기를 시도하였다. 


20세기 초반의 초고층 건축에서도 그는 새로운 건축공법의 창안을 항상 시도하였고 20세기 건축 기술의 진면목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는 이미 백 년 전부터 친환경적 건축의 방법과 이론에 대해서 많은 실험을 거듭한 끝에 자연과 혼연일치된 건축 공간의 실현을 시도하였다.


그가 말하는 유기적 건축의 세 요소인 시간, 공간, 인간은 시대정신과 환경,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유기적 건축에서의 시간은 건축이 탄생하는 당대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시대정신, 시대의지라 하였다. 

모든 시대는 고유의 공간형식을 가져야 자신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에 있어서 공간은 시각적 자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최대 걸작인 낙수장은 자연과 하나가 된 유기적 건축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는 역사와 지리와 인간을 건축 공간 속에 통합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는 기술자로서의 건축가, 예술가로서의 건축가이기 이전에 사상가로서의 건축가였으며 위대한 작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그의 삶 그 자체였다. 

이미 40대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였으나 그의 친구이며 건축주였던 친구 부인과의 스캔들로 인해 상류사회에서 버려지고, 대평원의 집으로 세계에 알려졌던 천 황금시대 이후 작가로서 한계에 부딪친 채 근 20년 가까이 잊혀진 건축가가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스승 루이스 설리번처럼 술에 탐닉하는 대신 잃어버린 창조력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자기반성과 연마에 몰입했다.


건축가로서 황금기일 수 있었던 50대를 철저히 잊혀진 채 지내던 라이트는 60세 이후에 세기적 걸작인 낙수장을 발표하여 화려하게 다시 일어선 후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걸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캘리포니아의 마린 주정부청사(Marin Country Civic Center)는 드디어 캘리포니아가 자신의 자연에 걸 맞는 크기의 건축 공간을 갖게 된 유기적 건축의 정수이며, 그가 낙수장 이후 16년의 긴 기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최후의 작품으로 남긴 구겐하임 미술관은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상형문자로 역사에 남았다.



축의 거장들, 즉 발터 그로피우스, 르 꼬르뷔제, 미스 반 데 로에 등보다 10여년 먼저 태어난 그는 91세 10개월 이라는 장수를 누리며, 죽음 직전까지 설계 작업을 계속해왔다. 

따라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광대한 작품을 남겼다. 


다작이었던 그의 업적 모두가 걸작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수많은 걸작을 남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자연의 생명과 조형 속에서 그 창조 원리를 찾아내어 그의 건축 이념을 확립하였고,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를 일컬어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 라이트의 건축적 사고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사고를 간단히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근원에의 탐구, 기하학적 형태의 추구, 공간-건축의 실체, 유기적 건축에 관한 것들을 선택하였다.



근원에의 탐구


'원리를 실행한 것은 사라지나,원리는 불멸이다.'

라이트는 건축을 함에 있어 본질과 근원을 찾고자 했고, 그것을 건축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는 건축을 생명의 가장 진실한 기록, 위대한 정신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건축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정신이고, 또 시대와 장소의 정신이었다.


‘어느 직품이든 나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 내 작품의 배후에 본질이 작용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한다면, 건축을 하는데 있어 자신의 방법에 완전성을 갖게 될 것이다.’



기하학적 형태의 추구


라이트는 순수 기하학적인 형태와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기하학적 형태로 그의 작품을 표현했다. 

기하학적 형태는 어린 시절 프레벨 교육시스템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에게 기하학적 체계와 그 디자인 특성에 대한 인식, 3차원적 솔리드와 보이드에 대한 감각, 다양한 요소의 구성 능력에 대한 이해, 복잡한 2차원적 패턴과 3차원적 공간을 ‘엮어내는 것’에 대한 매력, 2차원적인 제도판 위에 그린 패턴들의 3차원적 관계들을 시각화 하는 능력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것들이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형상과 더불어 더욱 발전하여 형태와 공간 구성으로 발전하였다. 

사각형의 결합과 조합, 삼각형 패턴의 연속된 반복 계획, 육각형이 주조를 이루면서 연속된 벌집형의 플랜 그리고 원형, 원추형 등 평면적인 구상에서 입체적이며, 조형적인 감각으로 발전되었다.



공간-건축의 실체


‘건축의 건실성과 본질은 지붕과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에 있다.’

근대 건축은 건물에 공간의 개념을 주었는데 특히 라이트는 둘러싼 공간을 건축의 실체로 보고 건축 이상으로써 공간 건축을 추구하였다. 


이 공간은 생명이 들어오며, 외부와 내부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 관입하여 공간에 흐름과 연속성을 준다. 

그에게 있어 단순한 상자는 마치 관과 같아서 사람을 감금시키고 에워싼다. 

이것은 비민주적인, 자유롭지 못한 건축이었다. 

모서리를 열므로서 빛과 사람의 움직임이 해방과 자유를 얻는다.



유기적 건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의 화두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유기적 건축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왔다. 


또한 그의 스승 셜리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셜리반은 신건축을 "유기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라이트는 셜리반의 사상을 기능주의적으로 오해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라이트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으로 완성시켜갔다. 


자연에서 추출된 그의 건축적 모티브는 가장 원초적인 개념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직관은 자연의 자태에서 형상화된 구조의 시스템을 비롯하여 형태, 내부와 외부 공간의 관입, 수직과 수평의 상호 연관 관계 및 연속과 확장, 반복 및 대립의 관계로 이어져 각각의 개체가 결합되면서 일체로 표현되는 유기적 건축의 맥을 이루고 있다.


라이트는 시대적 흐름의 격동과 역경 속에서도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적 사고의 근본인 유기적 건축론을 실제화 하면서 이론과 실체를 겸비하여 충실하게 표현한 건축가 이다. 


자연을 디자인의 모든 원리, 결과의 내부적인 요소로서 이해하였으며 기하학적인 평면의 전개와 입체 조형, 그것에 의한 내부와 외부공간의 융합, 자연과의 일체화 및 재료의 본질이 갖는 자연의 구조를 추상화해서 개발하는 것이 건축의 창조적 행위라고 여겼다. 


그러한 원리를 건축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평생을 일관되게 추구한 거장이었다. 그의 본질을 향한 탐구와 정신은 혼란되고 표피적인 오늘날에 다시금 목소리를 내고 있다. ‘건축은 사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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