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中 -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 - Wlater Groupus(1883∼1969)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즉,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로피우스의 파구스 구두 공장(알펠드 안 데르 라이네 1911)
파구스 공장은 그로피우스가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한 뒤에 의뢰 받은 최초의 큰 건물로구두 골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그와 이해심 많은 건축주의 만남은 당시 '가장 진보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다.
1. 형 태
- 통합된 입체적 볼륨으로 계획
- 벽은 하나의 판으로 계획
- 내, 외부공간 사이의 얇은 커튼 월로 고안
- 벽 기둥은 외벽면 뒤로 후퇴 = 외관의 커튼 같은 효과 실현
- 바닥슬라브가 있는 곳의 유리는 검게 채색 = 유리커튼 월에 영향을 줌
2. 구 조
- 사무실 부분은 조적조로 지어짐
- 정면에는 기둥을 갖고 있음
- 후면은 내력벽으로 되어 있음
- 바닥에는 철골보가 사용됨
3. 의 의
- 기능주의 건축의 최초 예 = 펩스너(1960)의 평
- 형태의 새로운 개념 부여 = 모퉁이 부분에 기둥이 없는 것. 구조적 문제가 아닌, 비물질적으로 처리하기 위함
바이젠 호프 주택
독일의 중부 지방도시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위치한 바이젠호프 언덕에는 새로운 건축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독일 공작 연맹'의 실험주택이 있다.
'독일 공작 연맹'은 1927년경 건축가와 예술가, 그리고 실업가들이 모여 독일 공업디자인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예술과 공업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태동한 모임으로 이들은 독일 근대건축 전개에 중요한 활동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고통받던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본다면 이 같은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 공작연맹에서는 개인주택들과 공동주택단지의 건설을 밀어붙였고 건축가와 예술가, 실업가들의 노력에 의해 바이젠호프 주거단지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바이젠호프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이와 비슷한 계획을 추진했다.
지금까지도 바이젠호프의 주거단지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젊은 건축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실현된 건축의 미래와 비전 덕분이다.
이 주거단지는 모두 33개의 거주 단위로 이루어져 단일 주택과 24세대가 입주하는 아파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단지 계획은 미스 반 데로(Mies Van der Rohe)가 중심이 되어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잔 네레, 네덜란드의 우트, 그리고 독일의 피터 베렌스와 발터 그로피우스를 포함하여 빅토르 부르주아, 부루노 타우트, 아돌프 라딩, 요제프 프랑크 등 당대 유명했던 건축가 17명으로 이루어졌다.
베를린출신의 바우하우스 초대교장으로 피터베렌스의 사무소에 근무한바 있고 독일공작연맹 회원이며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기계를 부정 하려하지 않고 기계에 의해서 성립되는 현대산업을 인정하고 산업과 예술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부재의 부품화와 현장에서의 조립과 같은 건축기법을 주장하고 주요작품으로는 조형위주의 건축교육을 하는 바우하우스 뎃사우 교사와 스승인 베렌스가 설계한 터빈공장건물 보다 더 대담하였으며 강철 지지대에 의해서 단절되는 커다란 유리벽면이 특징을 이루고 있는 파구스(Fagus)공장,하바드 대학원 건물을 들수 있다.
Walter Gropius, Harvard Graduate Center, Cambridge, 1950 | Bauhaus-dessau, 1925-1926 | 바우하우스 교사의 내부 현관 -조명기구는 모홀리가 디자인- |
파구스구두공장, (1911) |
--- 끝 ---
20세기 건축에 있어서 발터 그로피우스만큼 큰 역사적 역할을 한 사람도 없고 평가가 엇갈리는 건축가도 드물다.
그는 20세기 디자인의 가장 큰 흐름인 바우하우스의 창설자이며 하버드 건축대학원이 현대 건축의 큰 흐름을 주도케 한 현대건축의 리더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함께 일하기도 한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에 비해 건축가로서의 평가는 높지 않다.
그에게는 작가라는 말보다는 지도자라는 말이 어울린다.
프러시아의 중상층 집안이었던 거의 가계는 위대한 프러시아 건축가인 싱켈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 역시 어려서부터 싱켈의 영향을 받았다.
병으로 뮌헨의 기술학교를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그의 일가집을 설계한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로피우스는 다시 이모할머니의 도움으로 마드리드에 가서 공부하다가 유명한 예술감독인 칼오스트하우스의 소개로 또 다른 당시 최고의 건축가인 페터 베렌스에게 가게 된다.
거기서 후에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를 만나게 된다.
페터 베렌스 사무실에서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으나 20개월 만에 그만두고 충실한 협력자인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와 함께 그 자신의 사무실을 차린다.
이때부터 그의 지도자적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보다 일찍이 그는 대량생산 주택의 사회적 수요와 경제적 이익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글을 써서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AEG의 에밀 라테나우 회장에게 보낸다.
이 일로 해서 그 자신의 일을 얻게 되지만 그의 뜻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공업 생산의 시대를 대비한 공장의 개조와 확장에 대한 생각을 편지로 써서 많은 유력자에게 보낸다.
파구스 구두공장의 경영자인 칼 벤샤이트도 그들 중의 하나였고 벤샤이트는 이미 설계가 시작된 파구스 구두공장의 부분적 재설계를 그로피우스에게 의뢰한다.
그로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 중 4년간 상사로 근무하면서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의 족일군 최전선에서 특별임무나 휴가 외에는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그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생긴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쉰들러 말러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녀와 그는 1915년에 결혼한다.
그들은 1910년에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었다.
전쟁 동안 거의 만나지 못하자 그녀의 끊임없는 열정과 변덕이 그들을 헤어지게 했다.
1918년 그로피우스는 전후의 혁명 정신에 깊이 사로잡혔고 브루노 타우트와 예술동맹을 결성하고 건축선언을 발표한다.
1919년 그로피우스는 드디어 건축과 예술의 종합을 이루고자 예술동맹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조직 바우하우스를 바이마르에 창설했다.
1919년 바우하우스 선언에서 그로피우스는 “모든 시각 예술의 최종 목표는 완전 건축이다. 건축과 조각과 회화를 하나의 전체로서 통합하고 수백만 노동자의 손으로부터 새로운 신념의 상징과 같은 것을 끌어낼 새로운 미래를 욕망하고 인식하고 창조하자”고 선언한다.
그것은 정말 새로운 예술가와 장인을 위한 학교였다.
그는 예술적, 장인적, 공업적 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많은 예술가, 학자들을 모았다.
클레, 칸딘스키, 모홀리 나기, 브로이어 등 후에 세계적 작가들이 된 젊은 작가들이 바우하우스에 모여들었다.
젊은 작가들은 학생들과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일만이 아니라 공사일, 금속 작업, 목수일, 인테리어, 가구 등 모든 것을 함께 작업했다.
1922년 미국 건축가 레이몬드 M. 후드(Reymond M. Hood)의 고딕타워에 밀려 짓지는 못했으나 그가 제시한 시카고트리뷴 사옥안은 건축사에 중요한 제안으로 남았다.
1925년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바우하우스의 교사를 옮기면서 워크숍, 스튜디오, 오피스, 카페테리아, 오디토리엄, 스튜던트하우스 그리고 그로피우스의 개인 사무실까지 포함해 서로 브리지로 연결된 복합 건물이 그의 지도하에 탄생하였다.
20세기 현대 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가 세상에 형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로피우스라면 누구나 바우하우스를 떠올린다.
바우하우스가 현대 디자인과 현대 건축에 끼친 영향을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처음으로 미술이 건축을 중심으로 종합되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도래한 시민 중심 사회에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가야 할 큰 길을 연 바우하우스를 만들고 키운 중심인물이 그로피우스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바우하우스라는 건축 중심 학교에 끌어들여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건축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폭넓은 이해와 지지를 얻고 있었던 그로피우스만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우하우스에는 에콜 드 보자르의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교육을 선보인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설계에서부터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 교수 초빙 등 거의 모든 일을 해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느 누구도 그를 독단적이라 하지 않았다.
그는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였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그로피우스와의 교감을 통해 전체와 하나가 되어가는 공동체적 일체감을 느꼈다.
그로피우스가 지나가는 일만으로도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영감을 얻었다.
그로피우스는 항상 저소득층을 위해 빛과 녹지가 가득한 어반 스케일의 건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지멘스슈타트 베를린블록은 그런 그의 노력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가 1927년에 제안한 가변하는 토털 시어터(Total Teatre)는 아직도 건축가들이 꿈꾸는 이상적 극장이다.
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1934년 영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로피우스는 베를린에 사무실을 차린다.
영국에서 그는 맥스웰 프라이와 캠브리지 근교에 임핑턴빌리지대학(Impington Village College)을 설계한다.
그리고 1937년 하버드대학으로 초빙되면서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인상적인 현대 주택의 모델을 발표하며 뉴욕 세계박람회에 펜실베니아관을 설계한다.
후반기 그로피우스의 주요 작품은 1946년 설립된 건축가 협동체 TAC(The Architect Collaborative)과 함께 이루어졌다.
TAC는 맨해튼 파크 에비뉴 한가운데 우아하면서도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많은 뉴요커로부터 파크 에비뉴의 사카이라인을 차단하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1949년 TAC과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대학원 센터를 설계했다.
그는 하버드에 과거 건축에 몰두하는 에콜 데 보자르의 전통을 버리게 하고 사회적 가치와 공학에 근거한 새로운 건축을 심고자 하였다.
그가 하버드 건축대학원장에 취임하자 옛 교육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이러한 신사고는 미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하버드에서 그로피우스는 일주일에 두 번 꼭 학생들의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그는 말이 드물고 더군다나 그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모든 학생들은 그의 가르침대로 움직였다.
1952년 하버드 건축대학원을 허드넷에게 넘기고 그로피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건축 세계로 나간다.
1953년에 로드아일랜드의 주거단지를, 1954년에는 일본을 방문하고, 1957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항공사였던 펜암 항공사 사옥을 설계한다.
1956년 그는 개선장군과도 같이 독일로 돌아간다.
베를린에 그의 이름을 딴 오십만 가구를 위한 주거도시 그로피우스슈타트를 설계한다.
동시에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를 베를린에 세운다. 이어 미국 보스턴에 JFK연방사무국 건물을, 클리블랜드에 타워이스트를, 헌팅턴에 헌팅턴갤러리를 세웠다.
1967년에는 바우하우스 대(大)회고전이 대성공을 거둔다.
1969년 7월 5일 그가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전세계의 건축계가 그를 20세기의 가장 큰 일을 이룬 지도적 건축가로 애도했다.
그로피우스는 20세 때부터 영면할 때까지 66년동안 쉬지않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임무에 헌신하였다.
그는 혼자 이루기보다 모든 사람과 함께 이루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였다.
그는 천재는 아니었지만 어떠한 천재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이룬 20세기 건축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로피우스의 카리스마는 남을 추종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잠재력을 일깨우는 힘이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하던 때를 가장 좋았던 때로 회상한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란 단지 자기분야의 전문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고 역사의 바른 흐름에 참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믿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베를린의 주거 문제에 대해 쉬운 비판 대신 당장 실현 가능한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대안을 제안하였다.
그가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 그로피우스슈타트가 만들어진 것은 비판을 통한 수동적 현실참여가 아닌 대안 제시를 통한 능동적 현실 참여를 해온 그를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피우스는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도 그를 싫어했다.
독일 최고의 건축가가 독일을 떠난 것을 섭섭해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건축가에게 집을 지을 기회와 가르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스피노자와 같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렌즈가 건축가에게 있어서는 프로젝트이고 캔버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언으로 “나의 장례식이 축제가 되도록 하라”로 말했으며 유언대로 그의 장례식은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축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천재는 문제인이기 십상인데 그는 비범한 재능과 범상한 인격을 지닌 대인이었다.
그는 대건축가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때 르 코르뷔지에에 경도되어 그로피우스를 덜 평가하였었다.
30년 전 《공간》,《현대건축》의 편집 책임을 맡았을 때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미스를 주로 다루면서 그로피우스를 비중있게 다루지 않은 것은 거의 천재를 덜 평가하였기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그가 더 크게 느껴진다.
건축이 종합과학적 자리를 내놓고 디자인에 몰두하면서 현대 건축은 한갓 유행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백년을 돌아보면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은 엄청난 진보를 보이고 있으나 건축은 제자리에 서 있다. 지금이야말로 바우하우스가 다시 시작되어야 할 때다.
20세기 건축은 천재를 좇다가 건축의 본류를 잃었다.
건축가들은 유행을 좇고 건축 교육은 바우하우스 이전으로 퇴화했다.
건축가는 사회적 역할을 잃고 전문직으로 전락했다.
이제 도시설계는 토목 기술자들의 몫이고 도시의 미래는 행정가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로피우스같이 사회 전반과 우리 시대의 하드웨어에 대해 설득할 수 있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대건축가가 나와야 한다.
산업혁명, 민주혁명의 시대에 바우하우스가 있었듯이 정보혁명, 기술혁명 시대의 신 바우하우스를 만들 수 있는 제2의 그로피우스가 나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