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꼬르뷔제'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5.06.19 코르뷔제의 근대건축 5원칙 2
  2. 2005.06.19 르꼬르뷔제와 근대주의 1
  3. 2005.06.19 김효상 Le Corbusier 2
  4. 2005.06.19 김보경 현대 건축-르 코르뷔지에 3
  5. 2005.06.19 롱샹성당 3
르꼬르뷔제2005. 6. 19. 20:54

르 꼬르뷔제의 건축원리



필로티(les polotis)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있 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지면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 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성의 결론이다. 


시트로앙 주택계획 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 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은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꼬르뷔제는 1929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서 이 같은 구상을 찬란하고 명석한 형태로 실현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53년 낭트 레제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도 이같은 구 상을 관철시켰다.



옥상테라스(Le Toit-Terrasse) :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 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이 제기할 수 있다는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같은 옥상 테라스의 초기개념은 이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각지의 유니테다비타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서와 같이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vre) :


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 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수 있게 처리 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 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 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가로로 긴 창(La Fenetre en Longeu) :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앙주택 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파사드(Le Facade Livre) :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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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르꼬르뷔제2005. 6. 19. 20:53

르꼬르 뷔제의 공간적 비평 



우리가 건축에 갓 입문하여 듣는 몇몇 이름들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르꼬르뷔제, 미스 반 데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 알토, 로버트 벤츄리은 어떤 절대적 상징과도 같다. 


학교의 오리엔테이션부터 시작하여 첫 수업 날에도 듣는 이름들이며, 공부가 계속될수록 그들의 작품사진을 수없이 보고, 도면을 베끼고, 사상을 읽어가며 그 천재성에 점점 매료되어 간다. 

학교 수업도 그들의 작품 중심이고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까지 안주거리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하나의 이즘으로 묶어보자. 

당연히 '근대주의'이다. 

'근대주의' 역시 우리의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이름이며 하나의 신앙이었다.

근대건축 이전엔 우리가 배울만한 것들이 없는 양, 우리는 근대건축을 배워왔다.



그런데 '근대건축은 실패했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겠는가? 과연 있을 법한 이야기인가? 아니, 우리는 이러한 선언을 경청할만한 여유라도 갖고 있는가?

글쎄!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이미 오래 전 세상을 울렸고 80년대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이론이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고 윤일주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근대건축의 실패' 가 있다.


제목부터가 쑈킹한 이 책을 시작으로 몇몇 근대주의 비판서적이 나왔고, 이는 근대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열을 올리던 우리 나라 건축계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되었다.

필자 또한 어느 날 서점에서 느닷없이 이러한 책의 제목들을 보게되었고 호기심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건축에 대해 아직 생소하던 필자에게 소화해내기 이른 책들이어서 반도 읽지 못한 채 팽개치기를 반복하던 중, 도서출판 국제에서 펴낸 간행 3권에 있는 조인철님의 '근대건축은 실패하였는가'를 읽게 되었다.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근대건축의 실패이론을 다루고 있어 필자의 의문을 풀기에 충분하였다.

이글은조인철님의 논문을 바탕으로 전개하겠다.

일련의 근대주의 비판서적들이 주장하는 근대건축의 최대 문제점은 주로 역사성의 한계와 근대주의의 주된 이즘인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근대건축 비판 서적들은 근대건축을 역사성 즉 전통과는 단절된 건축으로 간주함으로써 실마리를 풀어간다.

Hitchcock 와 Philip johnson 의 저서 'The International Style' 에서는 건축이 과거의 답습에서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가가 건축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건축이 전통과 단절된 듯 보이는 원인과 근대건축의 탄생배경을 살펴 과연 근대건축이 전통이나 역사와는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건축이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산업혁명이후 건축관련 산업은 자유로운 디자인을 가능케 하는 콘크리트와 같은 신소재로 인하여 새로운 방식의 디자인 원리를 요구했다. 



새로운 재료는 새로운 구조방식을 가능케 하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새로운 디자인 원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건축의 역사나 전통에 연연하지 않고 건축이외의 분야에서 그 원리를 모색하려는 노력을 했는데, Oud가 추상화에서 디자인 원리를 찾아낸 것이라든지 르꼬르뷔제가 큐비즘과 생물학적 구조방식을 건축에 적용시킨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몇몇 예들은 확실히 과거의 어떠한 관습과도 결별한 듯한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인 것이 모더니즘이나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등의사조는 과거 권위에서의 탈피를 그 사상적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Quatremere de Quincy의 주장을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모든 나라에서의 일정한 건축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은 거의 틀림없이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장르에서 조차도 전혀 새로운 것은 나올 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모든 사물은 기본적인 원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집합적인 핵과 같은 것이다. 

기본적인 원리는 시간의 변화에 순응하며, 사물의 행태 전개와 다양화는 이에 따라 진행된다.



그래서 인류는 몇 개의 장르에서 수천 가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철학의 주된 목적은 그러한 것들의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건축에서는 소위 'TYPE' 이라고 하는 것이다.


Quincy의 주장은 다소 막무가내로 느껴지면서도 한편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몇몇 건축가를 제외하고는 소위 기능주의 건축가의

작품 중에도 전통과의 관련성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련성에 대한 논문으로 Collin Rowe의 글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르꼬르뷔제의 Garches 와 Palladio 의 Malcontenta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놀랍게도 두 건축물 사이의 평면 비례, 입면 비례, 옥상의 외관과 역할 등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부분들을 거의 완전한 연결고리로 결합시킨다.

첫째 평면상의 비례에 관한 것이다.

Garches에서는 중심홀이 있고 두 개의 계단실이 있다.

그러나 그중의 하나의 계단실이 Malcontenta의 계단실과 유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90도 각도로 틀어져 있다. 



더욱이 출입홀은 그 바닥의 비대칭적인 개방에 의해서 보여진다....

그래서 Garches에서는 십자형 평면이 단지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Malcontenta에서는 아주 명백한 십자형 축이 있는 반면에, Garches에서는 마지막 벽체의 중심공간(보이드)에 의해서암시된 교차하는 역동성은 함축적으로, 분절된 것으로써 전개되는 것이 허용된다.


둘째는 외견상 보기에 아주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Garches와 고전적인 Malcontenta의 입면상의 유사성에 관한 언급이다.

두개의 주택에 있어서 마루바닥 위로 Piano nobile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테라스나 주랑과 계단들의 상승에 의해서 정원과 연결된다.

Garches에서 정면 출입구는 Palladio의 상부 페디먼트와 등가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상층부의 중심적 요소이다.... 그것은 전체로써 입면에서 대칭성을 고무시키지도 않으며... 평면에서 보여진 중심성에 대한 동시적인 긍정과 부정같은 무엇이 보여진다.

세 번째로 르꼬르뷔제가 주창했던 건축 5원칙 중 옥상정원에 대한 것이다.

Malcontenta에서는 주택의 체적을 증폭시키는 피라미드형의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반면에 Garches에서는 주택의 체적으로부터 려내어진... 바닥을 둘러싸는 것으로서 작용하는 평평한 표면에 의하여 구성된다.

그래서 전자의 건물에서 지붕의 모습은 부가적인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으며 후자는 삭제하는 것으로써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과는 별도로, 양쪽의 지붕들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규칙적인 또는 대략적인 페디먼트나 파빌리온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벽체를 아래의 수직적 표면과 중요한 관계를 맺게하는 것이다.

그림과 같이 보여준다면 이해가 쉽겠지만 필자에겐 아쉽게도 스캐너가 없다.

근대건축과 기능(function)이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뜻하는 중요한 슬로건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일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 슬로건을 기능의 도구적 측면으로 해석하기 쉽고 근대주의 건축의 기능에 관한 비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혁명이후 새로운 건축재료의 출현은 건축가들에게 구조적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가능성에 부딪친 건축가들은 오히려 광활한 사막에 떨어진 느낌이었고, 디자인 과정에서의 수많은 선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줄 어떤 이정표를 찾게 되었다. 

이때 기능은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기계적이라는 의미와 합쳐져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류는 건축을 예술로 보기보다는 과학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건물에 치장되었던 모든 장식을 제거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건축에 있어 효율성, 도구적 기능성, 그리고 경제성과 상반되는 장식은 당연히 배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건축물에 적용되었던 장식적 디자인 원리들을 퇴보시키고 

또한 각 지역 문화마다의 특질과 관계없는 기하학적 단순형태들이 득세함으로써 

디자이너와 사용자간 이해의 괴리를 깊게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기능은 도구적인 의미로 고착화되었고 이로 인해 근대이후 집중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기능에 대한 비판의 주류를 이루는 주장은 건축가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기능에 대한 회의였다. 

즉 건축가가 생각하는 기능과 사용자의 욕구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이너 위주의 건축을 비판한 사람으로 Christopher Alexander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좋은 디자인 원리에 따라 훈련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의 건물과 도시를 디자인하자고 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점점 하이테크화 되고 있는 현대의 도시나 건축물을 아마추어들이 디자인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충분히 조직화되지 못한 환경에서의 혼란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근대주의가 주장한 기능을 도구적 의미로만 규정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기능에 대한 의미를 확장시키는 몇몇 귀기울일만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르꼬르뷔제의 슬로건인 '살기위한 기계로서 - 집'은 급진적으로 재평가 할 수 있는 훌륭한 기준이다. 

사실상 기계/집 슬로건은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어서 잘못 이해되기도 하고 잘못 인용되기도 했다. 

르꼬르뷔제가 정말로 의도했던 것은 2가지이다. 

첫째는 대량 생산되는 자동차와 같이 값싸고, 표준화되어 있고,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서비스가 용이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계를 닮은 집을 말한다. 



Citrohan이라는 것은 당시 프랑스 유모차 이름을 딴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또 한가지는 상속받은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정직한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디자인 된 것으로서 욕구에 잘맞게 서비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계를 닮은 집이라는 것이다. 



위의 글은 Reyner Citrohan의 것이다. 

또한 미학적 가치에 대하여 기능을 재해석한 예도 있는데 바로 르꼬르뷔제의 Citrohan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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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rohan House Model(1921)은 기술적으로는 그로피우스의 공장만큼 급진적인 것이고, 미학적으로는 Oud의 마을처럼 고상한 건축개념의 완벽한 표현이다. 


거대한 창문, 테라스 그리고 비대칭적인 구성은 Ferro Comcrete의 적용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건축정신을 완전하게 불어넣고 그때까지의 어떠한 건축물이 한 것보다 과거의 관습에서 탈피하는 디자인을 제시히게 되었다. 


앞의 내용들은 기능주의에 대한 경직된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기능을 기계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유모차처럼 아주 편안한 것으로써 모든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적공간으로, 

이상적인 기능을 전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근대건축을 이해하는 데 있어 Banham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기능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론자와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근대건축을 일단 부정한 상태에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지금의 건축과 미래건축의 출발점이 근대건축과는 완전히 분리되도록 강요하는 반면, 후자는 기능과 장식을 같은 선상에서 포용할 수 있는 입장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근대주의가 주장했던 기능에 대한 역효과가 없지 않았으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능은 현대에서도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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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르꼬르뷔제2005. 6. 19. 20:43

르 코르뷔제의 원명은 샤를르 에두아르 쟌느레로. 

스위스의 작은 도시인 랴 쇼드퐁에서 태어났다. 

코르뷔제의 건축사상은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건축형태의 근원으로서 르 코르뷔제가 응용하고 있는 공간관은 큐비즘과 미래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사물에 일반적 관심을 던져준 큐비스트들과 공간을 인접한 대상물들이 침투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미래주의자들의 공간개념을 코르뷔제가 건축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같은 공간개념과 형태구성원리를 기초로 하여 공간의 볼륨이 구성되며 구성요소로 벽을 선택하며 평면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공간개념은 논리와 이성의 요소들이 감성적이며 미적인 요소들과 하나의 연속적인 복합체로 구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코르뷔제는 도미노시스템이란 구조개념과 모듈러를 통해 근대사회에서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코르뷔제의 건축관이 담긴 작품을 살펴본다.



롱샹교회(Notre Dame du Haut, Ronchamp)









롱샹교회는 코르뷔제의 후반기 작품으로 20세기의 교회건축에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걸작이다. 

이 건물의 지붕은 많이 굽어 있으며, 구조적으로는 이중 쉘로 되어 있다. 

또한 경사진 두꺼운 벽에 나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좁은 실내를 다채롭게 하여 어두움을 느끼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널찍한 느낌을 준다.



사보아 주택(The Villa Savoye)
















사보아주택은 코르뷔제의 근대건축 5원칙인 필로티, 옥상정원, 수평연속창,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디자인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다. 


1층은 필로티로 만들고, 주실은 2층에 배치하여 일부는 선데크로 되어 있다. 

또 램프와 계단을 타고 3층으로 가면 옥상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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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르꼬르뷔제2005. 6. 19. 20:38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 1965]


프랑스 건축가. 


스위스의 라쇼드퐁 출생. 본명은 Charles Edouard Jeanneret. 고향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나, 건축공부는 거의 독학으로 했다. 

비판적 전위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지(誌)를 창간하여 건축 및 도시계획의 개념을 제시했고 구조와 상관없는 정교한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 맞서 싸웠으며, 기능주의를 옹호 했다. 


《에스프리 누보》에 실린 그의 논문은 《건축을 향하여(1922)》 《위르바니슴(1924)》에서 종합되었고, 또한 구체적인 도시스케일로 계획한 《현대도시(1922)》 《파리의 부아장계획(1925)》 등으로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사상을 만들어 갔다.


실제 제작을 주택 중심으로 한 《에스프리 누보관(館, 1925)》, 《슈투트가르트 주택박람회의 집(1927)》, 푸아시의 《빌라사부아(Villasavoye, 1928∼31)》 등이 알려졌다. 

《빌라사부아》는 석회질로 칠한 흰 벽의 기하학적 형태에 근대건축의 5원칙인 필로티·독립골조·자유로운 평면·자유로운 입면(立面)·옥상정원을 짜넣은 것으로 초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양식을 결정짓는 작품이 되었다. 


1927년 제네바의 국제연맹회관 현상설계에서 그의 응모작이 최종단계에서 심사위원단에 의해 거부된 것을 계기로 근대 전위건축의 가치를 옹호할 조직체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다음해에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의 창설을 추진했다. 

30년대 작품은 파리의 《스위스학생기숙사(1932)》, 파리 교외 《주말의 집(1935)》, 브라질의 《교육보건부 청사(1936)》 등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근대건축국제회의를 무대로 한 도시계획안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제 2 차세계대전 뒤에는 국제연합 회의 사무시설의 기획과 기본설계를 시작으로 마르세유의 아파트 《위니테다비타시옹》, 《노트르담 뒤오성당(1953∼55)》, 《라투레트 수도원(1957)》,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1959)》 《프랑크푸르트 예술관(1963)》 등을 남겼다. 

그의 건축양식은 근대건축운동의 기능주의와 조소적인 표현주의를 결합하여 국제주의 건축의 제 1 세대로 꼽히고 있다.




- 현대 건축의 5형식


필로티(les polotis)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있 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지면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 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성의 결론이다. 

시트로앙 주택계획 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 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 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은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꼬르뷔제는 1929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서 이 같은 구상을 찬란하고 명석한 형태로 실현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53년 낭트 레제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도 이같은 구 상을 관철시켰다.



뼈대와 벽의 기능적인 독립(La Fenetre en Longeu)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앙주택 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vre)

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계획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 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수 있게 처리 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 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 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자유로운 건물 정면(Le Facade Livre)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옥상 정원(Le Toit-Terrasse)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 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이 제기할 수 있다는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같은 옥상 테라스의 초기개념은 이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각지의 유니테다비타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서와 같이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 주거의 4형식


제1형

이 형식은 유기적 이유로 인접물의 옆에 나타나는 각 기관의 연결로 된다. 각기 유기적으로 연결된 매스로써 내부공간의 주위를 그저 그대로 벽면으로 덥는 방법인데 여러 가지 돌출부를 취하여 외부에 보인다. 

이 원칙은 거대한 구성으로 이끌어지나 만일 감시를 게을리 하면 변화의 과잉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 형의 예로는 라 로슈(La Roche)의 집이 있다.


제2형

절대로 순수한 피봉속에 기관을 틀어 넣는 것을 말한다. 

곤란한 과제지만 이것은 아마 정신의 쾌락을 의미한다. 

또 과해진 틀 안에서의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 예로는 가르슈(Garches)의 집이 있다.


제3형

외부로 노출된 독립뼈대에 의하여 단순 명쾌하여 마치 아네트모양 투명한 외피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각 층마다 변화시켜 각 실의 유효한 면적을 그 형태와 수량에 의하여 정할 수 있다. 

극히 용이하며 수단이 풍부한 구성, 예로는 슈터트가르트(Stuttgart)의 집이 있다.


제4형

외부에서는 제 2형의 순수한 형태를 나타내고 내부에서는 제 1형과 제 3형의 특정과 장점이 허용된다. 

순수하고 극히 일반적이며 또 수단이 풍부한 형, 예로는 사보아(Savoye)주택이 있다.




-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적 작품들




Name:Villa Savoye
Place:Poissy
Country:France
Built:1929
Designed:1928


사보아 주택은 1931년 아무것도 없는 푸아시에 있는 넓은 대지에 한 보험업자의 가족을 위해 세운 집이다. 

이집을 지을 때 르 코르뷔지에는 순수한 각기둥의 콘크리트 속에 진정한 건축적 표현을 투사한다. 

엄격한 골조에 따라 배치한 가느다란 필로티 위에 세운 이 집은 '차단막 없이 뻥 뚫린 지붕과 가로로 긴 창이 있는 공중에 떠있는 상자이다'.


사보아 주택은 전쟁중에 파손되고 20여년 뒤에는 토지 수용과 파괴의 협박을 당하다가(학교에 자리를 내주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대대적인 국제적 탄원 덕에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구제되었다. 

그 후인 1964년 앙드레 말로에 의해 사보아 주택은 그것을 지은 건축가가 아직 살아있었는데도 역사 기념물로 분류 되었다. 


'밝은 시간들'이라고 불리는 사보아 주택은 진정한 건축의 선언이다. 

우리는 여기서 건축가의 모든 '어휘'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발언과 논중의 강력한 힘은 '신건축의 다섯 가지 요점'을 실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요 방들은 실내 테라스 겸 정원을 향하고 있다. 

경사로 하나는 지붕겸 테라스겸 일광욕실로 통한다. 

여기서 '건축물에 의한 산책'의 모든 의미가 특히 풍부하게 드러난다.




Name:Chapelle Notre-Dame-du-Haut
Place:Ronchamp
Country:France
Built:1955
Designed:195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종교예술 위원회는 쿠튀리에 신부와 레가메 신부의 주도하에 예술과 건축의 창조적 정신으로 종교건축물의 건설계획을 추진하려고 노력한다. 


1937년에 착공한 아시고원의 성당은 1957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모리스 노바리나가 설계하고 바젠, 라제, 르 모알에게 장식을 맡기기도 했다(1949), 1950년, 마티스는 방스의 로제르 소성당을 구상하고 장식을 맡는다. 


1924년, 벨포르 협로를 내려다보는 롱샹의 언덕 위 보주산맥의 광활하고 수수한 경치 속에 세워진 네오 고딕 양식의 이 성당은 1944년에 폭격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브장송의 대주교는 르 코르뷔지에에게 성당의 재건축을 맡기고 싶어 주교좌 성당의 참사원인 라되르와 프랑수아 마테를 급히 그에게 보낸다. 


그들은 르 코르뷔지에와 몇 년 전부터 친분이 있던 쿠튀리에 신부와 함께 르 코르뷔지에를 설득해 설계 책임을 맡기는데 성공한다. 

롱샹을 처음 방문했을 때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수첩'에 연필 스케치를 하나 그렸는데 거기에 훗날 검토하게 될 핵심이 다 들어 있었다. 


이 작은 성당은 다양한 입체가 서로 맞물린 복잡한 건물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방에서 건물을 감싸고 있는 광대한 지평선에 노출된 역동적인 하나의 몸으로 보인다. 


긴 의자와 십자가는 브르타뉴태생의 고급가구 세공인인 조제프 사비나가 조각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성당 부근에 관리인의 집과 순례도의 집도 지었다. 롱샹 성당은 걸으면서 볼 때 그 참모습이 보인다. 

르 코르뷔지에의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도 더 그렇다. 


안에서 봐도 밖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좋은 건축물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걷고', '달린다'. 

그것이 살아있는 건축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기초'를 이루는 빛을 롱샹의 내부로 끌어들였다. 

작게 뚫린 채색유리, 부속성당의 '모자', 지붕 벽 모서리의 '틈'을 통해 빛이 성당 안으로 들어온다.





Name:Visual Arts Center
Place:Cambridge
Country:USA
Built:1964
Designed:1961


미국에 세워진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건축물. 

'시각예술을 위한 카펜터 센터'는 곡선형의 커다란 구조물 두 개와 그것들의 받침점 노릇을 하는 중앙의 정육면체로 이루어져있다. 

건물을 관통하는 S자형 경사로는 학생들을 '건축물에 의한 산책'에 초대하는 것 같다.





Name:High Court(Palais de justice)
Place:Chandigarh
Country:India
Built;1956
Designed:1952


대법원 청사는 거대한 기둥들과 파라솔 평판을 지탱하고 있는 아치형을 기본으로 세워졌다. 

긴 경사로에는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있다. 

복도는 개방되어 있엉 통풍을 원활하게 해준다. 

다양한 색치를 활용함으로써 거대한 기둥이 주는 긴장감과 차양에서 느껴지는 활기가 증대되고 있다.






Name:Maison d'homme(Heidi Weber)
palce:Zurich
Country:Switzerland
Built:1967
Designed:1963


르 코르뷔지에는 예술의 종합을 위하여 여러 건의 별장 설계를 검토했다. 

'인간의 집'(1964)은 강철로 만든 거대한 소라고동 모양의 장식으로 덮인 금속 구조 위에 설계했는데 이집은 하이디 베버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1967년 취리히에 세워졌다.





Name:Palais de I'Assemblee(Assembly)
Place:Chandigarh
Country:India
Built:1962
Designed:1952


인도의 찬디가르 도시계획에서 카피톨에 대규모 공공건물을 집결 시켰는데 완성된 세계의 건물중 하나인 국회 의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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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데로
르꼬르뷔제2005. 6. 19. 19:56

▲ 프랑스 동부 한 작은 마을에 위치한 롱샹교회는 2차대전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현대 교회건축에서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 르 꼬르비제에 의해 디자인된 불후의 명작이다. 



프랑스 롱샹의 노트르담 듀 오 교회
Notre-Dam-du-Haut, Ronchamp, France Le Corbusier, 1950-54

"나는 이 예배당을 건축함에 있어 침묵의, 기도자의, 평화의 그리고 영적 기쁨의 장소를 창조해내기를 원했다. 

 또한 이 예배당의 신성한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일하게 했다."  

 - 1955년 6월 Monseigneur Dubois 주교에게 보낸 Le Corbusier의 편지에서



이 노트르담 듀 오 교회 일명 롱샹교회의 설계자인 르 꼬르뷰제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프랑스 건축가로서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추앙 받고 있는 건축가이다. 

그는 현대건축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전 세계를 무대로 수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으며, 지금까지도 현대건축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0년 전에 완성된 그리고, 20세기 건축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 순례교회 롱샹은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인 건물로서, 현대건축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지금도 세계의 모든 건축가들이 반드시 순례해야 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교회는 프랑스 동부의 작은 시골마을인 롱샹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버린 옛 교회당 자리에 순례자들을 위해 지어졌다. 

교회 부지는 사방으로 멀리 아름다운 시골 풍경들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있다. 

로마시대부터 전략적 방어요충지였던 이 언덕은 성모 마리아를 위한 성당이 봉헌된 지난 4세기 이래로 순례지였다. 

13세기에 다시 채플이 지어졌고, 거기서 일어난 많은 기적의 소문이 지난 7세기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을 유혹하였다. 


이 채플은 1913년에 번개에 의해 파괴되었고 대신 신고딕 양식의 건물을 지었다가 1944년 가을 독일의 공격으로 폭파되었다. 

그 후 새로운 교회를 위한 디자인을 1950년에 꼬르비제에게 의뢰했다.


▲ 내부 예배실의 모습 



2차 대전 후 수많은 교회당의 수리와 건설의 과정에서 프랑스 종교예술위원회(the Commission d'Art Sacre)는 기독교 예술을 회생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이 위원회는 "다루기 쉬운 2류의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피할 수 없는 쓰레기" 대신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꼬르비제에게 이 롱샹의 새 교회당 설계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꼬르비제는 이 제의를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순례지의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기로 롱샹 출생인 루시앙 르뒈( Lucien Ledeur)신부의 끈기 있는 설득으로 결국 수락하였다. 

사실, 그는 사방으로 수마일의 멀리까지 펼쳐지는 부지의 경관에 매혹되었고 이러한 부지의 특성은 그의 최종 디자인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예배당의 목적인 '순례'의 행렬은 그의 건축 공간 디자인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건물의 공간과 형태에 대하여 관찰자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우리는 건물을

"접근하여, 보고, 흥미가 일어나고, 서서 감상하고, 돌아다니고, 발견한다."



건물의 기능과 관련한 프로그램의 요구사항은 비교적 단순했다. 

교회는 예배홀과 3개의 부속 채플들, 순례시기에 야외예배를 위해 사용할 옥외 성소 그리고 파괴된 옛 건물에서 건져낸 '성모 마리아와 아기'의 17세기 조각을 위한 집을 필요로 했다. 

마지막으로 언덕 꼭대기의 물 공급 부족에 대해 물을 모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따라서 롱샹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롱샹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경관 속에 하나의 작은 오브제로서 인간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그것은 또한 그 장소가 가진 역사의 기념비이었으며 인간의 새로운 역사의 흔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샹이 건축일 수 있음은 그 형태가 기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롱샹은 하나의 사다리꼴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이를 곡선화하고, 기능과 형태에 따라 적절히 부가되고 분절되면서 비대칭적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롱샹은 곡면을 이루며 깊은 처마를 가진 지붕과 그 지붕을 받치는 두껍고 경사지고 곡면을 이루는 벽체. 그리고 수직의 탑 등 3개의 요소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지붕은 교회당 뒤로부터 앞쪽으로 벽과 함께 상승하여 교회의 전면 모서리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건물 전면의 오른쪽 끝의 주 출입구 옆에 세운 큰 탑과, 건물 후면의 입구 양쪽에 서 있는 보다 작은 2개의 탑 등 3개의 탑은 이 건물의 수직적 요소로서, 벽과 함께 육중한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한다. 

이처럼 상승하는 지붕의 곡면과 벽체의 곡면은 그 내부의 예배 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3개의 탑들은 내부에서 예배홀에 부가된 크고 작은 기도실로 만들어져, 형태와 내부의 공간을 일치시켰다.

조개껍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지붕은 두개의 쉘(shell) 형태로 만들어졌고 곡면으로 길게 들어올려진 처마로 인해 대단히 육중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평면상으로도 곡선인 벽은 위로 오르면서 안으로 경사지고 지붕을 따라 상승한다. 따라서 지붕과 벽은 서로 하나로 통합된다.



벽의 두께와 경사는 상승하는 육중한 지붕의 무게감에 대해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지붕과 벽의 곡면은 언덕이라는 지형적 특성에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조각적인 형태들은 신석기 시대의 돌맨(dolman)의 강력한 힘과 필연성을 연상시켜 건축의 근원적 뿌리로부터 솟아 나온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그가 젊었을 때 방문하였던 비잔틴 미술과 희랍의 아크로폴리스의 영향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 평면도, 내부투상도


이러한 형태의 구성은 근대건축의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던 콘크리트라는 구조재료의 덕택이다. 

액상(液狀)의 콘크리트를 부어넣을 형틀만 만들면 어떤 형태든지 만들 수 있는 콘크리트의 가소성(可塑性)은 롱샹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대부분의 건축물을 가능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샹의 성과는 이 건축가가 재료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지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벽은 그의 말대로, "불합리하게, 그러나 실용적으로 두꺼운" 벽으로 어떤 곳에서는 3m가 넘는다. 그 깊이는 내부의 기둥들을 감춘다. 지붕은 벽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벽과 지붕 사이에 좁고 가느다란 틈을 만들었다. 벽 속에는 이전의 교회에서 수집한 깨진 기와조각들로 채워졌고, 벽의 표면은 콘크리트로 안팎을 뿜칠하여 거칠고 우둘투둘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롱샹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보는 장소마다 다양한 이미지와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수목 사이로 난 좁은 언덕길을 따라 교회를 향해 올라가면, 그 길 끝에서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까이서 처음 드러난다. 

여기서 본 롱샹의 모습을 담은 히렐 쇼켄의 여러 장의 이미지 스케치들은 수녀의 모자나 배 또는 기도하는 손, 어린 아이를 감싸 앉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롱샹의 형태에 대한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롱샹은 매우 원형적이고 정체를 알 수 없어서(enigmatic) 그것은 과거와 환경과 신앙 등 모든 영향들을 흡수하여 전혀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복합적인 건축적 경험이다.

그래서 외부와 내부, 지붕과 벽과 탑들, 앞과 뒤와 양 옆 모습들의 상호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그 건물의 주위와 안을 통하여 돌아다니며 시각적 체험의 여행을 하여야 한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례교회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순례자는 교회당을 오른쪽으로 돌아 북측의 입구를 향해 걸으면서, 끝없이 흐르고, 변화하며, 발전해 가는 교회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롱샹의 우수성은 다양한 요소들의 스케일의 연출과 모듈러에도 있다.

24.7m x 12.8m의 아주 작은 내부공간을 포함하는 이 기념비적인 건축은 그 구성 요소들에 따라 다양한 스케일로 구사되었다. 그는 그중에서 예배홀에 부가된 아주 작은 채플들과 창들 그리고 지붕 같은 몇 개의 요소들을 압도적으로 크게 만듦으로써 절묘한 공간적 긴장감을 부여했다.

"나는 방문자가 건물의 다른 부분들의 스케일을 쉽게 예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 말했듯이 그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샹의 모든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건물의 모든 요소들의 크기가 인체의 스케일과 황금비에 기초하여 만든 그의 모듈러에 의해서 구성된 비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기도실 상부 



내부 공간은 약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홀과 예배홀의 좌측과 후면에 부가된 성물실 및 3개의 작은 기도실로 이루어져 있다. 

예배홀은 성소 측으로 갈수록 폭이 더 넓어지는 사다리꼴 평면이고, 천장도 성소 쪽으로 부드럽게 들어올려져 있어 회중석과 성소가 더 가까이 그리고 개방적으로 느껴진다. 


더욱이, 성소와 회중석의 구별을 없애고 ‘하나의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교회의 본질인 통일성과 예배의 민주화를 공간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곡면을 이루어 볼륨감을 가진데다 거친 표면으로 인하여 더욱 육중해 보이는 어두운 천장과 거칠은 텍스츄어로 마감된 두꺼운 벽 그리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예배홀을 마치 로마시대의 카타쿰을 연상시키는 동굴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홀은 빛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천장을 벽에서 살짝 띄워 벽을 따라 길게 난 수평의 틈을 통해 빛을 유입시킴으로써 육중한 천장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두꺼운 남측 벽에 자유롭게 뚫린 작고, 깊고, 여러 가지 색깔로 채색된 수 많은 창을 통해 내부로 발산되는 빛들은 예배 공간에 신비한 빛의 효과를 연출한다.




▲ 다양한 이미지 스케치 



예배홀에 열린 알코브 형식으로 되어 예배홀을 공간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크고 작은 3개의 기도실은 높이 솟아있는 수직의 공간으로, 상부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빛이 거칠게 마감된 곡면의 흰 벽을 타고 내려옴으로써 기도실을 신비한 공간으로 만들고 저절로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한다.

채플의 가구들도 꼬르비제에 의해 모듈러를 기초로 하여 디자인 되었는데, 지붕과 벽, 바닥의 동적인 선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기하학적이어서 현저하게 대조적이다. 


제단은 석재로 만든 단순한 정방형이다. 

걸상들은 콘크리트와 목재로 만들었다. 

주철제 성찬난간은 교통 차단기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가벼운 시각적 조크인 듯하고, 바닥은 격자 패턴으로 강한 인상을 준다.


작은 색 조각들은 단색조의 내부공간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깨끗한 색 유리는 무늬진 정방형의 빛을 떨어뜨린다. 

벽 속에 상자처럼 만들어진 몇 개의 창들에는 건축가의 그림과 손으로 능숙하게 휘갈겨 쓴 경의의 단어들이 새겨져 있다.

남측의 폭 3m의 정방형 철제 출입문은 그 중심에서 피봇트 힌지로 움직이는데 그 양면에 꼬르비제의 자연의 추상적 모습(별, 구름, 강, open hand)들이 밝은 색깔의 에나멜로 그려져 있다.

이 교회에 특별히 디자인된 또 하나의 공간은 외부에 있다. 

이 공간은 매년 2번씩 축제일에 모이는 수천명의 순례자들을 위해 예배당 동측에 넓은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야외예배 공간이다. 

야외예배를 위한 성소는 동측으로 길게 내 뻗은 예배당 지붕의 처마 밑에 내부 성소의 외벽을 배경으로 설치되었다. 

여기에 제단과 성소 낭독대 그리고 지붕을 받치는 또 하나의 반 원통형 벽에 매달린 설교단이 성소를 구성하고 있다. 


내부 성소와는 작은 문을 통해 연결된다. 내부의 제단 벽 상부에 사각형 구멍을 뚫어 설치된 성모상은 이 야외 예배당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외부에 설치된 또 하나의 오브제는 서측 후원에 설치된 목제 종탑인데 낮으막한 높이에 3개의 종이 달려 있어 중세의 높이 솟은 종탑과는 대조적이다.

롱샹의 건설은 3년의 격렬한 반대 끝에 1953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어지기도 전에 교회의 차고(車庫), 핵 대피호 또는 콘크리트 덩어리라고 모욕적인 비난이 있었고 따라서 완성되었을 때 많은 소란이 예견되었다.

롱샹이 완성되었을 때 많은 건축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과거 40년 동안 선도해왔던 근대주의 건축이념의 모든 것에 모순되어 보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당시의 건축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어떤 이는 롱샹의 이런 비이성적인 형태와 정직하지 못한 구조를 근대주의 운동에 의해 신봉된 엄밀한 기능주의를 배신한 것으로 비웃었다. 


그 지도적인 건축가인 꼬르비제가 스스로 집은 살기위한 기계다.”라고 선언한 일이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은 롱샹을 근대주의의 엄격한 형태에 의해 너무 오랫동안 질식된 건축을 위한 자유의 찬가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비난과 찬양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이 롱샹 교회당이 20세기 전반의 교회건축들이 중세 고딕양식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학자들과 건축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수많은 시도들의 결정체로서, 현대 교회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었다. 


또한, 롱샹은 현대건축의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으며 지금도 신앙의 순례자 이상으로 수많은 건축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훌륭한 작품은 결코,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고 영원히 아름답게 존재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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