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별 이름
영국·미국- '아르누보 (ArtNouveau)'
독일- '유겐트 양식 (Jugendstil)'
프랑스- '기마르 양식 (Style Guimard)'
이탈리아- '리버티 양식 (Stile Liberty - 런던백화점 리버티의 이름에서 유래)'
○ 의미
1900년대를 전후하여 서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진 장식예술의 한 양식을 지칭.
○ 유래
1895년 파리에서 문을 연 사무엘 방의 메종 드 아르누보에서 유래.
파리에서 문을연 미술화랑 아르누보에서 시작이되었기에 아르누보로 이름지어짐.
○ 정신
신고전주의나 절충주의등 전통적인 취향에서 탈피하여(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도 연관)
시민을 위한 예술, 대중을 위한 예술 즉, 생활예술을 꿈꾸었으며 더 나아가 예술가의 자아를 존중하는 관념을 가짐.
○ 목적
"예술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이론을 기본으로 예술가의 주관성과 창작력에 의한 새로운 예술양식의 창조.
○ 특징
식물의 잎과 줄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늘고 긴 선적인 요소, 동물의 가죽무늬(반점 및 얼룩) 등에서 나타나는 면적인 요소를 디자인 모티브로 이용.
본격적인 근대산업사회의 태동과 함께 요구되는 새로운 형태와 미의 창조를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으로부터 찾으려 함.
곡선을 통해서 자연의 유동적 형태들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통해 가리워진 실재의 본질이나 자연의 창조활동의 무한한 과정을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직선보다는 소용돌이치고 서로 교차하는 곡선이 주로 사용됨.
곡선은 구불구불하고 물결치는 듯하며 음악적으로 율동하는 듯 흐르고 있으며 타오르는 듯 섬세하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힘을 지닌 상징저인 선으로 표현되어있음.
대칭에 의한 균형보다는 비대칭으로 균형을 추구.
외형적인 불균형은 생명과 운동을 암시하는 격동적인 요소를 야기시키는 불가분의 표현이 되고 있음.
○ 전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누보는 쇠퇴하기 시작. 아르누보의 작품들과 가구들은 한정되어있고 유일한 것이었음.
포스터와 잡지의 그래픽 디자인으로 아르누보가 대중화되자 많은 양이 제작되었고 필연적으로질이 떨어지게되는 현상을 가져왔고 장식의 그 본직적의미는 생각하지 않은채 표면적인 장식의 스타일만을 본뜬 모방자들이 조악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그 가치는 최하의 수준으로 떨어짐.
1차 세계대전으로 자연히 소멸되어갔으나 지금 그 운동의 소재, 방법, 의의를 지향하는 아르누보의
기본 태도를 받아들인 20세기의 디자이너에 의해 변모, 발전해감.
○ 결점
아르누보는 확실히 새로운 양상이기는 하지만 혁명운동치고는 너무 보수적이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뿌리없는 표면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음.
아르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의 한 발로 이상으로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음.
미술 공예 운동이 중세라는 이상에 근거하여 수공예를 통한 생활의 개혁을 지향한 것이라면, 아르누보는 자기를 그린 장식과 환상을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려 한 운동이므로 아르누보는 과거에서 이상을 찾기 보다는 자기를 추가한 것이며, 실재하는 육체가 아니라 정령을 형상화했기때문에 아르누보의 예술에서는 현실 자체를 소재로 한 것이 드뭄.
동시에 아르누보는 장인적 생산 체계를 도입하여 근대의 기술을 병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업 사회의 예술이지만 결국은 작가와 주문자의 취미의 세계에 머물고 합리적인 근대 사회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지닌 예술운동.
프랑스 아르누보 가구는 형태의 과장된 표현, 그리고 상감세공과 같이 그림이 든 장식으로 풍부한 로코코 전통의 유산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능숙한 기술에 높은 가치가 있었고 모든 방들의 통합된 디자인이 아니라 개별적인 작품들과 아름다운 재료들이 강조되었다.
아르누보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인기를 유지하였다. 로코코와 네오 로코코의 진수지가 프랑스였고 또한 19세기에 두 번 네오 로코코가 출현하였으므로 아르누보에 로코코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랑스 아르누보의 주창자로서 엑토르 귀마르(Hector Guimard)는 1882-85년 국립 장식미술학교의 외젠느 트랭과 샤를르 장누이 밑에서 공부하고 1889년에 에콜 데 보자르의 귀스타브 골랑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영국의 도메스틱 리바이벌 건축과 빅터 오르타의 소용돌이형 아르누보 양식 디자인에 자극받았다.
1894-97년에는 파리에 있는 카스텔 베랑제의 집합주택을 설계했는데 이것은 고딕 리바이벌과 앙리 2세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그의 카스텔 베랑제는 아르누보 양식이 표현된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에서는 대개 ‘귀마르 양식’이라고 부른다. 그의 디자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주철로 만든 파리 지하철의 압구(1903)로 이것은 아르누보의 소용돌이 무늬 장식을 사용한 전형으로 꼽힌다.
이것은 아르누보의 소용돌이 무늬 장식을 사용한 전형으로 꼽힌다. 귀마르는 1920년 시리즈 생산용으로 규격화한 첫 가구작품을 제작했다. 1920년대에 아르데코의 대두와 함께 아르누보 양식을 사용한 많은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귀마르도 그 후 유행에서 밀려나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졌다.
영국의 아르누보는 가장 중요한 예술적 개성을 가진 건축가이며 설계자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1863-1928)와 함께 글래스고우가 중심이었다. 매킨토시는 글래스고우에 있는 존 허친슨이 건축사무소에서 수업을 쌓는 한편,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야간수업을 수강하며 데생과 회화를 공부했다.
1891년에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와 파리, 브뤼셀, 앤트워프, 런던 등지를 여행한 뒤 1892년에 런던의 사우스 케싱턴에서 내셔널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7년 후에는 글래스고우에 새로 설릴된 허니맨&케피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1913년까지 근무했다. 매킨토시를 비롯하여 그의 부인인 마가렛 맥도날드 매킨토시, 마가렛의 동생인 프랑세 맥도날드 맥네어, 프랑세의 남편인 허버트 맥네어는 ‘The Four’라고 불리웠다.
1894년에 최초로 공동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이들은 1896년에 런던의 아트&크래프트 협회에 1900년에는 빈의 제 8회 분리파전에 출품하여 절찬을 받았다.
흰색을 주조로 하는 매킨토시의 인테리어는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 같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1896-1909년에 걸쳐 매킨토시는 자신의 대표작인 글래스고우 미술학교를 비롯한 몇몇 공공건물과 개인주택을 그래스고우와 그 근교에 설계했다.
그 중에는 1902-03에 지어진 힐하우스도 포함되는데 전용 실내장식품이며 가구까지 함께 갖추어졌다. 그의 인테리어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글래스고우 티 룸으로 이는 뷰케넌 거리(1896)와 아가일 거리(1897)에 있다. 이 두 개의 티룸은 조지 월턴과 공동으로 설계한 것이다. 매킨토시의 유명한 타원이 달린 등이 높은 의자는 아가일 거리의 티룸을 장식했으며 나중에 완성된 잉그램 거리와 윌로 거리의 티룸은 식탁용 나이프, 포크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가 도맡아 디자인했다.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그의 전체론적 접근방식에는 상징주의가 활용되고 현대성과 전통, 빛과 그림자, 남성다움과 여성스러움 등 반대요소들의 조화가 두드러졌다.
매킨토시는 대표적인 글래스고우 파의 디자이너로 초기에 즐겨 사용했던 유기적 양식과 후기의 기하학적 양식은 빈 분리파와 빈 공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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