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es van der Rohe
(1886 -1969) [생애][작품]
1886 독일 아헨. Aix-Chepelle 에서 5월 29일 태어남
1897-1900 Aix-Chepelle 소재의 Cathedral School을 다녔다.
1900-1902 Aix-Chepelle 소재의 Ecole des Arts et Metiers에서 공부했다.
석공이었던 아버지의 일터에서 일했다.
1902 현장주임으로 일했다.
1903-1904 석공세공인의 공방에서 치장벽토의 장식을 그렸다.
1905-1907 베를린에 있던 부르노 파울의 스튜디오에서 견습 가구디자이너로 일하였다.
1908-1911 베를린에서 피터베런스와 일했다.
1912-1937 베를린에 건축사무실을 열었다.
1921-1925 11월 그룹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6 독일공작연맹 전시회 대표 건축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젠호프 주거 단지
1926-1932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
1929 바르셀로나의 국제전시회를 위한 독일 파빌리온의 건축가.
1930-1933 뎃사우와 베를린의 바우하우스 교장
1931 베를린의 구축전시회에서 '우리시대의 주거' 라는 제목의 공작연맹파트의 대표
1938-1958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공과대학긔 건축대학학장. 캠퍼스에 새 로운 건물을 디자인하게 된다.
1938 시카고에 건축사무실을 연다.
1948 시카고 고층건물 계획안에서 유리와 철의 커튼월을 처음 적용함.
1950 대구조 스팬 시스템을 적용한다.
1959 독일연방공로상 수상.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영예와 존경을 받게된다.
1963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을 수상하였 다.
1969 시카고에서 8월 17일 사망.
■ 미스는 1886년 3원27일 Char Iemagne의 옛날 도시였던 아헨에서 태어났다.
현대건축 4대 거장 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9년 미국태생으로 미스보다 한 세대나 앞섰던 반면에 1883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월터 그로피우스와 1887 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르 꼬르뷔제는 미스와 같은 세대의 인물들이다.
4대 거 장 중 월터 그로피우스만이 정규 대학에서 건축교육을 받았을 뿐 다른 세 건 축가들은 모두 정규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건축수련을 쌓은 것이 주목할 만 하다.
미스는 15세까지 고향 아헨에서 성당 부속학교를 다녔으며 후에 아버지가 운 영하던 석재시공회장의 현장과 어떤 스터코(석재 종류의 마감재) 시공회사의 제도실에서 건축에 첫 발을 딛기 시작하였다.
19세 되던 1905년에 큰 뜻을 품고 베를린으로 간 그는 처음 일하게 된 건축가 의 아틀리에에서 자신이 나무 구조와 가구에 대한 지식이 너무 빈약한 것을 깨닫고는 당시의 저명한 가구 디자이너이며 건축가이기도 하였던 부루노 파울 을 찾아가 그 밑에서 배우게 된다.
미스는 1908년부터 3년간 베렌스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면서 칼 프리드리히 쉰 켈의 작품 세계에 심취하게 된다.
베렌스 사무실 시절의 끝 무렵에 미스는 화란의 저명한 미술 수집가였던 크뢸 러 일가의 저택 설계를 위하여 오랜 시간을 화란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를계기 로 핸드릭 페트루스 베르나게의 건축에 큰 감명을 받았다.
베르나게가 보여주 는 구조의 진실성과 논리는 미스 자신의 창작 태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스가 제작하여 세계에 발표한 5개의 프로젝트가 현대 건 축운동의 선구자로서의 미스의 위치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첫번째 프로 젝트는 1921년에 있었던 현상 설계안으로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종착 역의 맞은 편에 자리잡은 삼각형의 대지에 고층 오피스 빌딩을 설계하는 것이 었다.
미스가 제시한 안은 입체의 모든 면이 전면 유리로 감싸여진 결정체로 도로 면에서부터 20층을 단숨에 올라가는 듯한 안이었다.
이 현상 안을 끝낸후 미 스는 유리 고층 건물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겼던 듯, 1922년에 Glass Skyscraper안을 발표하였다.
미스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Free-form Amoeboid의 평면으로 구성된 이 프로 젝트는 우선 평면의 크기가 '프리드리히스트라세안' 보다 작은 반면에 30층 까 지 올려진 입면에 의하여 더 탑의 느낌을 주는 비례를 지니고 있고 미스의 말 을 빌리자면 도로 레벨에서 보이는 건물의 입체감과 유리에 반사되는 성격을 충분히 살리기 위하여 그 외관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조형적 창의력이 풍부한 이 두 고층 건물 안과는 아주 대조적인 '콘크리트 오 피스 건물안'을 미스는 1923년에 제작하여 전시하였다.
현자의 패널만으로 이 루어진 콘테차콜 투시도로 이 계획안은 라멘구조 (철근 콘크리트 구조 방식) 의 성격을 간결하고 우아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미스의 5개 프로젝트 중 마 지막 둘은 '전원 주택안' 이었는데, 1924년의 벽돌 전원 주택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로서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그 잠재적인 가능성이 충분히 탐구된바 없다.
서로 직각 방향으로 배열된 조적 벽면들 사이사이로 일련의 연결된 공간이 형성되고 몇 개의 조적 벽들은 지붕 을 구성하는 장방형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 속으로 뻗어나가는 이 디자인은 5 년 후 미스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공간감을 예고해 주 고 있다.
일년 앞서 1923년에 발표된 콘크리트 전원 주택 평면의 Zoning 개념 을 보여주고 있다.
1차 대전 후에 일련의 프로젝트로 명성을 확립한 미스를 알고 있지만, 그에 게는 프로젝트를 통하여 어떤 건축의 문제를 분석하고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 는 습관이 있었고 제자들과 후배들에게도 프로젝트로 끝나는 설계안을 만들어 볼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1960년 미국 건축가 협회 A.I.A의 금메달 수여식에서 미스가 한 짧은 답사에 서 그의 생각을 그의 건축 작품에서 보는 명료함과 간결성을 갖고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학생, 건축가 그리고 관심있는 일반인들에게서 여러 차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갈 길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 운 건축을 고안 해 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한 시 대의 끝이 아니고 시작에 처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새로운 정신에 의하여 지 배될 것이며 새로운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힘에 의해하여 움직여질 것이며,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재료를 구사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새 건축이 생길 것 입니다."
" 그렇다면 건축은 문명의 가장 으미있는 노력에만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연관 관계만이 진실합니다. 이 연관 관계를 나는 진실 의 양면 관계라 부르고 싶습니다. 토미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Adequatio intellectus et rei의 '진실' 또는 현대의 철학자가 현대어로 표현하듯이 '진실이 란 사실의 의의'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연관 관계라야 우리 문명의 복합성을 포용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건축이 우리 문명의 형태가 천천히 변 하여 가고 있는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독일에서 건축가로 출발할때부터 미스는 과거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했으 며 대신 사용 재료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해주는 기술적 수단을 추구했다.
그는 구축의 엄격한 표현을 선호하여 모든 장식을 거부했다.
그의 많은 계획 은 지어지지 않은채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그 각각의 시대에는 너무나 대담한 유토피아였다. 무엇보다 이것은 사상을 만든 건축이었다.
재료에 내재하는 이런 특질은 이미 미스의 목탄 스케치와 모델에서 확연하다.
특히 유리는 고층건물의 둔감한 외피로서 간주된것만은 아니다.
도리어 유리 는 빛이 굴곡된 벽에 부딪히는 방식에서 반사와 그림자를 만드는 풍요로운 요 소로서 이해된다. 전체의 접근은 어떤 근본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축체계에 새로운 강조를 두는 것으로 구성된다.
■ "규율" 이 말은 미스의 삶과 일의 표어였다. 규율, 질서, 명징함, 진리
첫째 - 벽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응시하는 것
둘째 - 한가지 재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어 여러 가지 전통적 재료로 나아가 는 이성적 훈련이다.
셋째 - 현대의 특징적 재료 철, 콘크리트, 유리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넷째 - 현대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 실용 목적은 물질적 진보의 척도일 뿐이다.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이야말 로 문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무엇이 기능이고 무엇이 가치있는 일 인가를 하나씩 명확히 해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 미스의 건축에 보편성을 가지고온 건축적 문제 - 기둥과 피막
미스가 자주했던 "Less is More " 는 말수가 적었던 시절의 성격을 나타낼 뿐 아니라 철저히 아이디어를 정제해 내는 그의 제작 태도를 이야기 해 준다.
솔직함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라는 문제는 철과 콘크리트는 강함을 나타내는 건물의 뼈이다.
유리는 빛나는 베일처럼 그 뼈를 감싸는 외피이다.
미스의 마천루 계획안에서 뼈와 외피가 완전히 분리되어 뼈는 안에, 유리 외 피는 밖에 두고 바닥과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는 일과 날씨로부터 실내를 지키 는 일 사이에 시각적으로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 미스에게 영향을 준 개념
1922년이래 정기적으로 데 스틸의 데오 반 데부르그가 베를린을 찾아오고 있 었기 때문에 미스의 주택 작품에서 보이는 선형 비대칭의 평면 구성은 데 스 틸과의 화가가 즐겨 사용하던 직선 장방형, 사각형 처리법의 어느 부분의 영 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벽돌 주택 : 네모난 유리오 벽돌 덩어리 조합은 반통겔루의 작품을 연상시킨 다.
평면계획은 몬드리안의 초기 회화를 연상시킨다.
1910년 (라이트 베를린 전시)에 미스가 라이트로부터 얼마나 강하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평 면은 전형적인 라이트의 전원주택 그대로이다.
■ 미스에게 건축이란 재료로부터 공학을 거쳐 중요한 형식과 예술서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교육에 의하면 우리들은... 우연성과 임의성에서 탈출하여 합리적인 명쾌함과 이성적 순서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 다."
--- 끝 ---
우리들은 모든 연상적인 미 또는 학설 그리고 모든 형식주의를 부정한다.
건축은 시대요구를 공간으로 실체화하고 거주하고 변화하고 새로이 전진하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니며 오직 오늘 이라는 날만이 형태를 조성할 수 있다. 오직 이런류의 건축만이 창조되어야 한다.
형태는 우리들의 직무에서 그 성격상으로 보아 건축의 문제만을 생각해야 한다. 형태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형태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가 목적이라고 하는 것의 형식주의 라면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우리 임무의 본질은 미적인 연상을 통제하고 어떤 것을 제외하고 무엇을 회복시키는 가에 따라서 건물을 자유롭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미스의 건축사적 사고는 그가 건축에서 형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나찌즘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미스는 그 시기 공간 속에서 어떻게 용(用)을 관련시킬까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방을 단위로 용(用)에 대응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말을 지었다.
기능개념을 가지고 용(用)을 그 위에 결론짓는다면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행위이다.
행위 그 자체는 사실 용(用)의 실태이므로 그것은 현실에서 가구와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하며 유동하고 거리낌 없는 광대한 원룸 안에 미스는 가끔 가구를 배치한다.
공간은 단지 가구만을 사이에 두고 행위에 직접 장(場)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것도 수용하는 공간을 미스는 '유니버설스페이스'라고 부른다.
또한 정해진 사용실태를 결코 규정하지 않는 공간에 융통성을 주는 것이 코아 시스템이다.
판스워스 주택은 미스가 미국에서 실현시킨 두개의 주택 중 하나로 건축주는 독신 의사 에디스 판스워스 이다.
시카고 교외 폭스천 부근에 세워진 이 집은 그가 최초로 실현시킨 클리어스판의 건물이기도 하다.
그 내부공간은 간결한 동시에 자유롭고 L, H형 서비스 코아, 즉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이 유일한 폐쇄적 요소였다.
테라스, 약간 높은 바닥면 그리고 평지붕, 이 세 부분의 수평면이 여덟 개의 H형강 기둥으로 용접 되어 잔디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공간은 설비 코아를 중심으로 상이한 기능을 갖는 공간이 천정까지 도달되지 않는 하프파티션에 의해 구분된다.
또 바닥이 높이 들려 있는 것은 폭스천의 범람에 대처하기 위한 기능적인 해결이었을 것이다.
이 집에 사용된 재료는 아주 적은 것이었지만 기발한 사용법으로 훌륭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디테일의 엄격한 배려가 미스의 작품을 다른 에피고넨의 그것과 명확히 다르게 하고 있다.
주위의 풍경 속에서 투명히 나타나는 마치 홀연히 출현한 테크놀로지의 부산물 같은 이 건축은 미스가 이상으로 하는 공간을 구현한 것이다.
한편 미스의 주택에서 우리는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린 새로운 타입의 인간을 위해 건설한다는 관념적인 목표설정이 현실의 요청과는 대립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택은 그래서 당연히 고가이며 소수의 부유층에 한정되어 버린다.
다음으로 내외의 공간적 연속성을 실현하기에는 충분한 녹지에 의해 주택 전체가 외계로부터 격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완벽한 조형은 전체의 조화를 파괴하지 않고는 부분적 변경을 허락치 않는다.
때문에 그의 건물에 대한 이용자 측은 자기변혁에 의해서 건물과 완전히 동조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즉, 이용자 자신에게 완전성과 자기억제, 절도와 고상, 우아함과 취미의 풍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현실과는 무관하였다.
참고적으로 미스는 늘 완벽에 가까운 시공수준을 요구했고 그 때문에 급상승한 공사비를 둘러싸고 미스와 건축주인 에디스 판스워스 의사 사이에서 재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합리주의 건축가중 미스 이외에 자유로운 생활방식에 대한 추상적, 유토피아적, 그리고 고결한 희망을 그와 같이 철저하게 건축에 구현 시킨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비적인 연금술은 '적으면 적을 수록 풍부하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을 반영하는 것이고, 즉 본질에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나타내는 해답은 예술의 과제를 동시대의 절망적인 혼란 속에서 질서를 잡는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자기의 건물을 자연 혹은 대도시의 혼돈 된 상태에서 이성의 오아시스로 자리하게 함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타내는 형태는 무관심이라든지 또 역으로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기 쉬운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며 그의 노력으로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시지프스의 비극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1922년 베를린의 한 건축 현상설계에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철골조와 유리만으로 된 프리드리히가(街) 오피스빌딩안(案)을 제출하기 전까지 인류 역사상 어느 건축가도 그런 건물을 그린 적이 없었다. 현대 도시의 특징인 글라스타워(유리 마천루)는 거기서 시작된 것이다. 거의 실험적 제안은 같은 해 발표된 ‘글라스 스카이스크레이퍼’에서 한층 구체화 되었다.
--- 끝 ---
조로하는 천재들과는 달리 미스는 세기의 역작인 글라스타워를 만든 이후에도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위대한 건축 작품을 만들었다.
1886년에 태어나 1969년 영면할 때까지 평생 그는 건축에 몰입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수도였던 독일 아헨의 묘비 석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미스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미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일찍부터 중요한 건축가들에게 건축 교육을 받았다.
1907년 스물하나의 나이에 실력 있는 젊은 건축가를 찾던 건축주에게 발탁되어 첫 작품을 만들게 되었을 때 건축주가 그에게 이탈리아 여행의 기회를 주었으나 2년 넘게 지중해를 여행했던 르 코르뷔지에와 달리 미스는 고향의 침침하고 흐린 날씨가 그리워 햇볕 가득한 지중해를 떠나 중도에 돌아온다.
1908년 미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지도자인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 들어가 그로피우스, 아돌프 마이어, 르 코르뷔지에 등과 함께 일한다.
이때 싱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에게 구속될까 두려워 그때의 스케치 모두를 불살라 버렸으나 싱켈적인 신고전주의적 사상과 비례는 오랫동안 그의 작품에 남는다.
베렌스 사무실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헤이그의 크뢸러 하우스 설계였는데 크뢸러 부인의 설득으로 자기 자신의 안을 만들었으나 결국 그 일로 사무실을 떠나게 된다.
베렌스의 사무실을 나온 후 1913년에 결혼하고 상류사회에 발을 딛게 되면서 미스는 젊은 예술가, 지성인 그룹에 참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발칸 전선의 철도 엔지니어로 참전하였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 딸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으나 결혼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베를린 중심부의 옛 주거 지역에 집 겸 사무실을 차리고 직업 건축가로서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세계를 벗어나 역사주의를 배격하는 모더니즘의 물결에 참여한다.
미스는 처음에는 1920년대 표현주의 건축의 대표적 그룹인 11월 그룹의 방관자로 있다가 나중에는 주동자로 적극 참여한다.
자유필름연맹, 사회주의연합 등 전위 운동은 물론 독인예술동맹에서 브루노 타우트, 한스 펠치히, 휴고 헤링, 그로피우스 등과 함께 일한다.
이런 사회 활동 중에도 그의 건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계속되어 유명한 다섯 프로젝트를 목탄과 파스텔로 표현한, 미술전보다 더 미술적인 건축전시회를 연다.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글라스타워의 효시인 프리드리히 오피스빌딩이었다.
다섯 프로젝트 전시회의 처음은 베를린에서, 다음은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3주년 기념전에서, 마지막은 파리의 데스틸 건축전에 초대되었다.
이후 그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건축가 그룹인 제네르링의 리더가 되고 독일공작연맹과 함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맡게 된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에 족일의 지도적 건축가 이외에 르 코르뷔지에, J. J. P 오우드 등 세계적 건축가를 초대하면서 미스는 서서히 지도적 건축가로 자리하게 된다.
미스는 서른셋의 단독주택과 연립주택군 중 단 하나인 아파트먼트를 설계하고 마스터플랜을 주도한다.
첫 번째 마스터플랜은 힐사이드를 조각적으로 처리한 것이었으나 최종안은 독일 빌라 단지의 전형적 배치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가구와 모던 인테리어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예산과 공정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는데 미스는 내부 공간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처음으로 가동벽을 사용하고 그의 첫 의자인 튜블러 스틸 의자를 만든다.
이를 계기로 유명한 바르셀로나 의자와 투겐드하트 의자를 연이어 만들게 된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미스 생애의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이때 처음으로 뛰어난 디자이너이기도 한 릴리 라이흐를 만난다.
그녀는 그가 사무실에서 작품을 놓고 토론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바이센호프 주거 단지 이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0여년 넘게 그녀가 위대한 천재에게 미친 영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라이흐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으며 직물과 텍스타일 산업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927년 미스와 라이흐는 ‘벨벳과 실크 카페’를 함께 디자인하고 다음에는 실크 제작자인 크렐휄트의 집과 공장을 설계한다.
이어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주택의 하나인 직물 제작자 투겐트하트의 집을 짓게 된다.
투겐트하트 하우스에서 미스가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문손잡이에서 커튼레일에 이르는 집의 모든 부분을 디자인하게 된 것은 라이흐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투겐트하트 하우스는 그리테와 프리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탄생시킨 아른다운 공간이다.
그리테는 브르노시(市)와 스필베르크성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두 아이를 가진 그리테가 미혼인 프리츠와 만나면서 브릭 하우스에서 살고 있던 미술 평론가 푹스로부터 미스를 소개받는다.
미스는 처음에는 개인 주택이라 망설였으나 현장을 가보고 크게 만족하여 설계에 착수하였고 드디어 1930년 완성하였다.
프라하에 간 건축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브르노에 가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현대 건축 최고의 주택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투겐트하트 하우스와 거의 동시에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인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 독일관을 설계한다. 원래는 국가관이기보다 산업관이었고 미스에게 맡겨진 일은 예술감독이었으나 부감독인 라이흐와 함께 일하면서 국가적 정체성 표현에 더 큰 역점을 두게 되었다.
독일관은 전시공간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파빌리온 뒤의 270여 개의 독일 상품이 전시된 전시장으로 가는 입구 기능을 하는 공식 행사의 리셉션 장소로 기획되었으며, 오프닝 때 스페인 왕과 왕비가 오니스월 앞에 놓인 골든 북에 서명하고 리셉션라인을 마주한 곳에 왕관같이 놓인 바르셀로나 의자에 앉도록 공간 설계가 이루어졌다.
1931년 미스는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1933년부터 독일 경제는 하강하고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문화 열정이 나치에 굴복한 것을 미스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후 현상설계마다 낙선한다.
그로피우스의 지명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지명된 후 새로운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새로운 교수진을 영입하고 라이흐를 인테리어 책임자로 지명하는 등 바우하우스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나치가 문을 닫게 한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미국에서 여러 제의가 들어왔다.
그로피우스에 앞서 하버드대학에 석좌교수로 초대받았으나 같은 시기에 시카고의 아머대학[일리노이 공대(IIT)의 전신]으로부터 학장으로 초대되자 아머대학으로 간다.
새로운 캠퍼스를 마련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교수 선발권 모두를 위임받고 독일을 떠나 시카고에 정착한 후 미스는 평생을 시카고에서 보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캠퍼스 건설이 중단되자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 특히 커리큘럼 개발에 몰두한다.
커리큘럼의 기본 구조는 바우하우스의 기본 코스를 따른 것이나 “건축은 시대정신(Zeitgeit)의 표현이어야 한다.” 는 그의 건축 철학이 커리큘럼의 기반이 되었다.
미스가 취임식 때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은 진실의 빛남”이라는 말은 건축의 질서, 명증성, 보편성에 대한 그의 신념을 대변한 것이다.
미스는 교육에 몰두하면서도 그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후 30년 동안 미국에서의 그의 위대한 협력의 시대는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미스의 활동은 창조적이며 진실하던 역사적 참여의 시기인 독일에서의 생활과는 달랐다.
이미 그의 이름은 세계의 것이었고 그에게는 릴리 라이흐 이외에도 그를 이해하며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미국에서의 여생은 위대하였으나 글라스타워,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섬광 같은 것은 다시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에서의 영광스러운 30년은 장엄한 낙조와 같은 시간이었다.
시카고의 860호반 아파트. 뉴욕의 시그램 빌딩, 베를린의 신독일 미술관 등은 또 다른 걸작들이지만 시대정신의 치열한 각인은 아니었다.
필립 존슨이 쓴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책은 미스의 형이상학과 조형의지를 알게 하는 저작으로 책 뒤에는 미스가 평생을 쓴 글이 실려 있다.
30년을 미국에 살았으면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세속과 떨어져 살았던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라는 절제의 미학을 감동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의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와 글라스타워에 감동하여 1968년 신문회관에서 연 두 번째 전시회에서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 메탈 하우스, 캐피탈 하우스라는 이름의 실험주택을 선보이고 다음 해에 글라스타워의 다음 단계를 의도한 스카이 빌리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스의 건축을 보고 당황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하여 “미스는 위대하였으나 현대 건축은 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미스(miss)되었다”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유럽의 건축을 알게 되고 현대 도시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미스 건축의 역사적 의미와 미학적 기반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미스의 프리드리히가 오피스빌딩 스케치를 보고 그의 엄청난 미술적 재능에 놀랐다.
미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끝없는 버림을 통해 드디어 ‘less is more'를 실현한 것이다.
미스는 건축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날개를 가진 현대 문명의 시대정신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과 도시의 미술 형식으로 실현한 진정한 20세기 문명의 상징적 건축가다.
가우디, 매킨토시, 라이트, 르 코르뷔지에 등 위대한 천재들이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보다 미스 한 사람의 영향이 더 크고 깊다.
그들이 건축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크지만 현대 도시와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은 미스보다 크지 않다.
라이트가 농촌 스타일의 자연 친화적 도시 건설을 주장하다가 만년에 마일하이타워를 발표하면서 혁명적인 초고층 도시 제안을 하고, 르 코르뷔지에가 이미 1930년에 ‘빛나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파리의 혁명적 도시구조 개혁을 제안하였으나 정작 지나고 보니 현대 도시는 미스가 1920년에 제안한 글라스타워를 기본 형식으로 삼은 셈이 되었다.
미스는 건축에 있어서는 혁명적이었으나 도시에 관해서는 자연과 역사가 이룬 현존하는 질서로 이해하고, 기존 도시를 새로운 건축 형식으로 진화하도록 건축과 도시의 대위법적 구조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 도시의 대세가 되었다.
그의 건축은 건축 철학과 미학의 가능성과 보편성을 제안한 것이었다.
초기의 콘크리트 하우스, 브릭 하우스, 글라스타워 등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건축 형식으로 제안한 것이며, 이전의 모든 건축과 다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역시 역사시대의 건축과 다른 이차원집합의 건축 형식을 실험한 것이다.
투겐트하트 하우스 역시 독특한 대지에 특별한 주인을 위해 설계된 개인주택이면서 어느 대지 어느 주인에게나 가능한 주거 형식을 선보인 것이다.
보편 공간이 되어야 하는 업무공간과 전시공간에 있어서 그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담는’ 새로운 현대적 공간을 창출하였고, 지금 그의 미학은 다시 의상을 바꾸어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것이 아메리카 대륙은 북미는 대부분 영국의 식민지였고 남미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는데 정작 영국과 스페인의 건축가인 매킨토시와 가우디가 아메리카 대륙에 미친 영향은 미미한데 반해, 아메리카 대륙에 전혀 진출하지 못했던 독일의 미스가 아메리카 건축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매킨토시와 가우디가 개인적 천재에 몰두했던 데 비해 개인적 천재를 억제하고 역사의 의지와 소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미스의 작가정신에 더 많은 건축가들이 공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매너리즘에 가까운 포스트모더니즘이 탈(脫, post)되고, 해체주의가 해체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건축의 흐름이 미스의 세계를 다시 잇고 있는 듯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스는 아직 여전히 새롭다.
주 요 작 품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 바르셀로나(German Pavilion) 1929
이 건축은 오늘날 지어졌어도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인 건축이었다. 상대적으로 긴장감 있는 부재의 크기와 요철없이 매끄러운 재료의 대범한 사용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판스워드 주택, 일리노이(Famsworth House) 1946~1950
이 주택은 그의 전작인 바르셀로나 박람회 독일관과 베를린 미술관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붕판과 바닥판을 잡아주는 U형강의 보에 의해서 결구되어 있는 단순한 구조물이다.
모서리 부분은 유리로만 연결되어 있어 개방된 부분은 건물의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집주인은 이 집이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살 수 없다며 미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시카고(North Lake Shore Drive Apartment) 1949~1951
당시의 미국 건축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 고층 건축물의 외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쌍둥이 빌딩"이다.
두 개의 보륨을 가진, 이런 유형의 빌딩의 효시 이기도 하다.
26층 높이의 두 개의 육면체가 직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어 시각에 따라 생동감있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건축물에서 사용한 외부의 철골 디테일은 미스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소위 인터내널 스타일의 대표적 외관이 되었다.
시그램 빌딩, 뉴욕(Seagram Bldg) 1945~1958
현대의 사무용 고층 건축물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의 건축 철학과 예술관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삼일빌딩도 이 건축물을 모범으로 한 것이다.
크라운 홀, 시카고(Crown Hall.I.I.T.) 1951~1955
기둥간격이 36M인, 무주공간을 상자형태로 만들어 융통성을 극대화했다
국립미술관, 베를린(New National Gallery) 1962~1968
높이 만든 기단 위에 자리한 이 건축물은 미술관 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벽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여덟개의 십자형 강철기둥들로 지지되는 정사각형의 지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외주부에는 기둥이 없다. 그러나 이 건물도 역시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건물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Barcelona Chair’
바르셀로나 의자는 시각적으로 경쾌할 만큼 가벼워 보이고, 단순하며, 좋은 품질의 소재가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미즈 디자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X자형 프레임과 블록을 쌏아올린 것 같은 가죽 퀼팅은 세련미의 정수이다. 스틸 평단철에 크롬도금을 하였던 오리지날 디자인은 미국에서 생산되기 시작과 동시에 내구성이 강한 스테인레스 스틸 바로 교체되었으며, 크롬도금 대신 스테인레스 스틸의 자연스런 멋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762(W) x 762(D) x 762/430(H/S)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으로 집, 사무 공간, 상업 공간 등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작품." 1929년 바로셀로나 국제 전시회의 독일 전시장 인테리어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제품이다.